큰애는 등교할 때 버스를 탄다. 학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단 한 대. 배차시간은 30분이다. 7시 30분 버스를 타면 학교에 딱 알맞게 도착한다.
3월부터 그 버스를 탔다. 그리고 그때부터 버스 승객 중 한 남성이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걸었다.
학기 초엔 교복을 입지 않았다. 그 사람은 큰애에게 "교복을 왜 안 입어요? 교복 입으세요."라고, 때론 "교복 입어."라고 반말로 지시했다. 큰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난처해했다. 그는 지적장애를 가진 성인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3월부터 6월의 반을 넘긴 지금까지 그 사람은 내 아이에게 계속 지시했다. 너무 불편하고 무섭기도 한 아이는 그 남성을 피하기 위해 30분 일찍 버스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쯤 해보니 그것도 힘들어서 결국 원래 타던 시간대의 버스로 돌아갔다. 큰애 학교에서는 최근에야 교복을 입기 시작했는데, 그런 날엔 그 남성이 교복 입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날 조차 큰애를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계속되었단다.
그 남성은 때론 아이 옆자리에 앉았다. 때론 큰애가 앉아있는 좌석 바로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제는 하차하려고 일어섰더니 아이에게 후다닥 다가왔다. 아이의 학교 체육복 허리에 새겨진 이름을, 자신의 얼굴을 불쑥 들이대고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000씨! 교복 입으세요!" 옆에 있던 여성 승객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린 큰애는 나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 너무 당황스럽고 무섭다고.
그 남성 때문에 무서워서 자주 우는 큰애를 보며 남편은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다. 하지만 상대는 지적장애인이다. 그가 아이에게 직접적인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다. 몸에 손을 댄 적은 없다. 게다가 큰애 말에 따르면 그 버스엔 승객이 꽤 많이 탄다고 한다. 만약 누가 봐도 위협적인 순간이 큰애에게 닥쳤다면 승객들이 이미 말려주었을거다. 아직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걸 보면 그 남성을 저지시키기엔 지금까지의 상황이 애매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이젠 그가 큰애의 이름까지 알아버렸다. 아이는 점점 더 힘들어한다. 부모로서 더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는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 후 그가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는 큰애 쪽으로 다가와서 아이 앞에 섰다.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몸집이 작은 여학생인 큰애가 겁을 먹을 만했을 듯 싶었다.
나는 그에게 큰애와 함께 찍은 셀카를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이 애가 얘고요, 이 사람이 접니다. 저는 이 아이의 엄마입니다." 내가 갑자기 말을 걸자 그는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더듬 더듬 이렇게 대답했다. "어, 어, 이... 이... 000(아이 이름)!" 어제 처음 본 이름을 기억하다니. 나는 조금 놀라서 그의 말을 급히 막았다. "아니오, 저희 애 이름을 읽거나 부르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불편해해요."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 어... 교복, 교복 입어야..." 그는 나를 어려워하면서도 '교복'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꺼냈다. 교복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서 그의 말을 듣고 몸짓을 보니 그는 생각보다 지적장애가 심했다. 누군갈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의 엄마이다. 몇 개월간 힘들어 한 내 자녀를 위해 할 말을 해야 했다. 최대한 단순하게, 무섭지 않게, 쉽게 부탁하려고 애쓰며 말을 꺼냈다.
"그쪽이 제 딸에게 3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교복 입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이는 학교에서 입으라는 대로 입은 거예요. 더 이상 저희 애한테 교복 입으라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많이 불편해해요. 꼭 부탁드릴게요."
그는 내가 이야기하는 짧은 순간 동안 불편해하고 불안해했다. 뜻을 알 수 없는 "으음... 아아... 11월... 11월..."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손으로는 자신의 교통카드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고개를 내 시선으로부터 반대쪽으로 돌렸다. 불안해하는 그를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아, 이 사람은 내 아이보다 더한 약자구나.
내가 할 말을 다 한 뒤에 그는 반대쪽 좌석에 앉아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불안을 그렇게 달래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큰애에게 말했다. "저분은 너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엄마가 얘기해 보니 지적 · 정신적으로 많이 어려우신 분 같아. 엄마의 이야기를 잘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어. 혹시라도 또 교복 이야기를 하면 그땐 네가 또박또박 말해봐. 학교에 체육복 입고 가야 할 때도 있다고. "
그가 큰애의 복장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교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 건 어쩌면 자폐 성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폐 성향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자신이 정립한 질서대로 돼야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청소년으로 보이는 큰애가 교복을 입지 않는 걸 보며 그는 마음이 몹시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버스를 매일 타는 것 자체가 그에겐 만만치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버스를 타고 매일 정해진 장소로 이동할 만큼 성장했다. 그만큼이나 자립했다. 불편을 안고 사회 속으로 나왔다. 이만큼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했을까. 적응하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그의 부모는 얼마나 애썼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집에 돌아와 아까 읽던 성경을 펼쳤다. 다윗과 므비보셋에 관한 이야기를 읽던 중이었다. 그제야 말씀이 차분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 므비보셋. 하나님은 이미 나에게 주의를 주고 계셨구나.
다윗에겐 요나단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둘 사이는 각별했다. 요나단은 생전에 다윗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자신의 집안에 변함없이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시간이 흘러 요나단은 전사하고 다윗은 요나단에게 남은 자손이 있는지 수소문한다. 마침내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낸다.
요나단의 죽음을 전해 들은 므비보셋의 유모는 므비보셋이 5세때 그를 데리고 황급히 몸을 피한다. 그러다 그만 므비보셋을 땅에 떨어뜨린다. 그렇게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모두 다쳐서 장애인이 된다.
왕이 된 다윗은 죽은 친구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후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째, 너희 집안의 땅을 모두 너에게 돌려주겠다. 둘째, 언제나 내 식탁에서 식사를 해도 좋다.
"그리하여 므비보셋은 다윗의 아들들처럼 다윗의 식탁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모두 절었습니다."(쉬운성경/ 사무엘하 9:11,13 중 발췌)
다윗은 친구의 아들이자 장애인인 므비보셋을 자기 아들들처럼 대우했다. 자신의 자녀들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식사하게 했다. 내 아이를 보호하고자 새벽부터 기도하며 긴장하던 나에게 하나님은 딱 맞춰 이 말씀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 아이뿐 아니라 그 지적장애인도 몹시 아끼고 계시다는 걸 알려주고 싶으셨것 같다.
그러나 내 아이에게만 마음이 팔렸던 나는 집에 돌아와서야 이 말씀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후회됐다. 그 남성에게 조금 더 친절할걸. 다윗처럼, 먼저 그 사람이 느낄 두려움을 안심시켜 줄걸. 내 아이처럼 그 사람도 이 버스를 계속 잘 타고 다닐수 있게 더욱 배려해서 말할걸.
매일 기도했다. 큰애가 버스에서 힘들지 않게 해 달라고, 그 남성 때문에 큰애가 불안하지 않게 해 달라고.
앞으로는 이렇게 기도해야겠다. 나의 접근과 부탁 때문에 그가 힘들었다면, 그 불편한 마음이 잘 해소되게 해 달라고. 내 아이의 복장이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지 않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들과 내 아이처럼, 그 사람이 앞으로도 같은 버스를 편안하게 이용하게 해 달라고. 그분이 어디서든 다른 시민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잘 생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도와달라고. 나와 아이도,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사는 법을 배워나가게 도와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