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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14. 2020

가출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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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어디 가요?"

"산책 다녀올게"

"언제 와요?"

"30분"


문을 쿵 닫고 서둘러 집으로부터 달아났다. 산책을 빙자한 30분간의 가출이다. 얕게나마 에어컨을 틀어놓아 보송하고 서늘한 집 보다 습도 90%에 가까운 어두운 여름 길에서 마스크를 한 나는, 겨우 숨통이 트였다. 


디스토피아 영화 같은 산책길에 도착했다. 엑스트라들이 착용한 마스크는 시원하게 내놓은 팔다리와 대비됐다. 그들은 상하행을 스치며 걷고 뛰고 굴러갔다. 자연스럽게 합류한 나는 행인 1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별이 한두 개쯤 보이는 개떡 같은 도시 하늘을 이따금씩 쳐다보며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멍청하게 걷다 보니 마음에 망울진 뭔가가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길 곁으로 무성하게 난 풀들이 촉촉한 바람에 따라 초록색 동물의 털처럼  출렁인다. 그 속에 숨은 풀벌레들은 TPO에 이보다 더 잘 결합될 수 없을 만한 멜로디를 뽑았다. 또렷하면서도 감미로운 아카펠라였다.

바로 어제 봤던 책 『난처한 미술 이야기 1』에서 어떤 작품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 1만 7000년 전에 그려진 황소들이었다. 저자는 말했다. "모든 미술 작품은 그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인 환경과 함께 봐야 합니다. 어떤 재료로 그려졌느냐에 따라 그 이미지가 주는 메시지가 180도 달라지거든요." 만약 그 황소 그림이 아파트 벽에 그려져 있었다면 나는 감동했을까.

잘 시간이 되면  자주 틀어놓는 유튜브 영상이 있다. <10시간_ASMR_잠 잘때 듣는 조용한 여름밤 귀뚜라미 소리>. 이걸 틀면 아이들도 슬슬 잘 시간이라는 걸 안다. 편안한 풀벌레 소리는 들떴던 하루를 가라앉히고 잘 준비 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환하게 부푼 상현달빛을 받으며 꿀렁거리는 초록 스피커에서 들리는 살아있는 서라운드 사운드는 달랐다. 미술처럼 소리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재료와 함께 어우러졌는지에 따라 감동의 크기가 달라졌다.


오늘 아침, 큰애는 이른 벽두부터 온라인 수업을 들었다. 두 시간도 안 되어 큰애의 공부가 끝났다. 들어야 하는 수업이 남은 둘째 옆에 가서 큰애는 말을 걸고 장난을 쳤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선생님 말씀은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낄낄거리고 속닥거리는 두 아이의 입김은 안 그래도 가냘픈 그 연기를 풀풀 흩어버렸다. 결국 내가 출동.


"동생 공부할 땐 옆에 있지 말아라.", "네에~" 하지만 계속 둘이서 장난침.  

몇 분 후 다시 출동. "동생 공부할 땐 네 할 일을 하든지 혼자 놀고 있으라고.", "네에~" 그러나 여전히 꾸물거리며 계속 장난침.

"00야, 동생 공부 안 끝났으니까 네 방에 좀 가 있으라고", "네에~" 하지만 킥킥킥 헤헤헤 쫑알쫑알 소리만 들려옴.


겨우 세 번의 지체에, 나의 인내의 방 내부 압력이 높아진다. 붕괴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비상 사이렌이 미치광이처럼 돌아간다. '와 이런 (삐이이) 이놈들 진짜 이 (삐이이이이) '


테드 창의 단편소설 「이해」에 나오는 호르몬 K가 급히 필요하다. 주인공은 호르몬 K 치료를 받은 후 극단적인 천재가 되다 못해 거의 초인이 된다. 심지어 자신의 신장 기능, 영양 흡수 등을 생체적으로 자각한다. 마음의 프로그래밍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과학자님들, 호르몬 K 좀 개발해 주세요. 그러나,  엄마로 살다 심장 박동이 거칠어지는 순간, 호르몬 K를 처방받으러 병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한들 그 결심 몇 초 전에 이미 인내심은 결딴나 있을 테지.


"아아~니~! 네가 거기 있으니까 동생이 집중을 못 하잖아!!

동생 공부 끝나면 그때 같이 놀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엄마 말을 왜 안 들어?!! 정말 너무너무 힘들다!!!!!"


대관절 온라인 수업 들을 때마다 둘의 만유인력이 배가 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공부가 똑바로 되는 게 기적이지. 온라인 수업 마치고 둘째가 풀어온 곱셈 숙제엔 2x3=5, 3x3=6이라는 정신없는 답이 적혀 있다. "수학의 명제가 현실에 관한 어떤 설명을 제공하는 한 그것은 불확실하며, 명제가 확실하다면 그것은 현실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라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말했다던데. 이 경구의 심오한 의미를 나 같은 생무지가 어찌 가늠하겠느냐만, 수학의 명제가 불확실한 둘째의 답안은 그의 공부 현실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묘사한 듯하다. 아인슈타인님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아셨어요? 아, 또 천불이 올라온다.


나는 아직도 아인슈타인을 붙잡고 있는데, 큰애는 한 소리 들은 걸 100 밀리 세컨드의 속도로 잊었는지 금세 명랑하다. BTS의 다이너마이트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고선 음악에 맞춰 들썩거리기까지 한다. 체육시간에 이 곡에 맞춰 창작 댄스를 하는데, 자기 파트의 동작을 구상 중이다. 신통한 동작이 안 떠올라 고민하는 큰애에게 둘째가 말했다. "그냥 팔을 흔들며 걸어봐."


큰애 대신 그날 저녁 내가 팔을 흔들며 걷게 될 줄이야. 저녁엔 읽던 책이나 마저 볼 생각이었는데 충동적으로 나와 풀벌레 소리를 가르며 걷고 있다. 수천 마리일까, 수만 마리일까. 셀 수 없이 많은 풀벌레 소리가 이렇게 한꺼번에 들리는데 어떻게들 연습했는지 튀는 소리도 없고 묻히는 소리도 없이 절묘하다. 고양감과 평온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너희들의 정체는 뭐니. 인간들은 오늘도 자기 이익을 지독하게 손에 쥐고 홉뜬 눈을 했는데, 너희들은 바보같이 이런 노래를 어째서 무상으로 들려주는 거니. 인간과 풀벌레의 이데올로기는 얼마나 다른가. 세계 저 끄트머리에서 이 끄트머리까지의 거리만큼 다른 것일까.


작은 생명들의 고운 소리와 하루 종일 내가 만들어낸 소음들은 야수파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대조된다.

오전엔 큰애에게 버럭질을 했다. 점심 차리면서는 도마에 화풀이를 했다. 왼손에 애호박을 쥐고 탕! 탕! 썰었다. 개떡 같은 소리를 근면 성실하게 뱉어내는 인간들, 나와 같은 신을 믿는다고 하는데 신의 말씀도, 주변 이웃들의 고통도 일절 읽어내지 못하는 무리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 네? 이렇게 탕! 탕!... 네?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는 살벌하고 형이하학적인 기도를 뱉었다. 성경 「시편」엔 악한 자를 저격하는, 이래도 되나 싶은 기도가 수두룩하다. 거기에선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영원히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라는 건 차라리 선비의 점잖음에 가까운 구절이다. 호르몬 K를 주사 맞지 못한 채 날 선 칼을 든 나는, 지치고 화나고 슬픈 마음을 손끝에 모아 정교한 혐오를 애꿎은 도마 위로 발포했다.


애들! 탕! 학교! 탕! 쫌!! 탕!! 가자고!!! 탕!!!!!!


코로나 바이러스가 왕성하게 확산되던 때, 목소리를 내겠다며 광장에 모인 사람들. 그들이 행사한 자유 때문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등교할 날은 팽창하는 우주처럼 멀어졌다. 다음 달이 될지, 석 달 후가 될지, 내년이 될지 알 도리가 없다. 무엇이 자꾸만 마음에서 부글부글 끓어 넘친다. 부글대는 냄비의 뚜껑을 열고 터프하게 국자로 거품을 걷어낸다. 아까운 채소 한 조각이 딸려 올라와 거품과 함께 싱크대로 버려졌다. 마음이 끓어 넘쳐 애꿎은 한 조각만 낭비했네...


아이들 점심을 뚜다닥 차려냈다.

"... 어어, 으아악! 꺄악!!!" 식탁에서 둘째의 갑작스러운 비명. 

"왜 그래?!"

"... 파프리카에 벌레 있어요. 으이잉~ 저기 저기~"


작은 애벌레가 붙어 있었다. 냉장고의 한기와, 흐르는 물의 씻김과, 가차 없는 칼질에도 멀쩡하게 살아남은 작은 생명. 

"살았나?... 어! 움직인다 움직인다!"

무섭다고 소리 지르던 둘째는 밥은 뒷전이고 이젠 애벌레를 신기한 듯 관찰한다. 애벌레는 다행히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자신이 어떤 기가 막힌 고비를 넘겨 생존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다이너마이트 노래에 맞춰 꿈틀꿈틀 잘도 움직였다. 점심 먹은 후 아파트 화단에 파프리카 조각과 함께 애벌레를 놓아주었다. "잘 가~ 좋은 어른벌레로 커야 해~" 손을 흔들며 작별했다.


하루가 저물수록, 아이들은 점점 심심해졌다. 그림책도 다 봤고, 둘이서 노는 것도 시큰둥해졌다. 심심하다고 투정 부리던 둘째는 작품 활동에 돌입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종이가 퐉! 구겨지고 꺼이꺼이 곡소리가 났다. 하는 일이 마음대로 잘 안 풀리면 즉각 울어버리곤 하는 아이. 콱! 퍽! 팍! 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좌절의 울음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아이를 몇 번 달래주던 나의 인내심은 파도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 도저히 여기 못 있겠어.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 시선을 못 본 척했다. 내 마음이 살기 위해서 우리 잠시 비대면의 시간을 갖자, 고 마음으로 말했다.


내 맘을 힘들게 한 건 뭐였을까. 말 안 들은 아이, 예민하게 잘 우는 아이, 덜떨어진 나의 인내심, 전국 여기저기서 숨통을 조여오듯 퍼지는 코로나 바이러스, 90퍼센트의 습도, 끊이지 않는 내 식욕과 집안일, 진로에 대한 고민, 뉴스 헤드라인을 치장하는 미친 이야기들. 

우울한 내 마음을 도마에 올려 탕! 탕! 썰어버리고 싶다. 괴상한 현실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싶다.


이런 게으른 생각을 하며 고민과 기도마저 피곤해지던 날. 그날 아침에 읽었던 "혹 우리를 슬픔에 빠지게 하시더라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예레미야애가 3:32)"라는 성경 말씀과, 에피파니 같았던 풀벌레들의 근사한 노래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소망과 힘이 솟게도 하고.


가출은 약속대로 30분 만에 끝났다. 아이들은 내가 없는 동안 자기들끼리 할 일을 다 했노라며 쭈뼛쭈뼛 말을 걸어왔다. 머쓱하고 미안한 나는 아이들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유튜브로 가짜 풀벌레 소리를 틀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둘째 아이가 생긋 웃으며 "엄마 사랑해요. 좋은 꿈 꿔요"라고 인사했다. 나도 똑같이 말하며 궁디 팡팡, 볼에 쪽쪽 해줬다. 큰애는 평소와 조금 다른 밤 인사를 했다. "엄마, 미안하고 고마워요". 마음이 덜커덩했지만 침착한 척 "뭐가 미안해. 엄마도 고마워"라고 허둥지둥 말하며 안아주었다. 

문득 파프리카의 애벌레가 떠오른다. 앞으로도 기가 막힌 고비들을 잘 넘겨 건강하게 살아남아 근사한 노래 부르는 멋진 존재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 아이들, 떠올리면 코끝 찡해지는 사랑하는 이웃들과 가족,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같은 기도를 신께 드려본다. 내일은 내 기도가 조금 고와지려나.

점심때 흘렸던 한 조각 마음을 다 저녁이 되어서야 주워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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