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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18. 2020

나무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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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백화점, 쇼핑몰. 나에게 이런 곳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생필품을 사러 가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장 보러 갈 땐 반드시 필요한 품목을 적는다. 마트에 가면 필요한 물건을 빠르게 찾아 산 후 집으로 휘리릭 돌아온다. 저런 곳에서 모종의 아이쇼핑 같은 건 없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경하는 일에 영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쌓여 있는 마트의 물건들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뿐, 물건 사용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선반에 빼곡한 잉여 산물들은 소비주의와 과다 소비가 만연한 세상의 민낯 같아 보인다. 한 해에 지구가 줄 수 있는 양이 1이라면 지구인들은 1.75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모두가 미국인처럼 지구를 사용한다면 지구 5개가 필요하다는 탐욕적인 현실을 시각화 · 물질화 시켜 놓은 곳이 마트, 백화점, 쇼핑몰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따로 있다. 거기엔 생존에 꼭 필요한 게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거길 가면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퐁퐁 솟는다. 호기심과 의욕, 즐거운 흥분이 느껴진다. 도서관은 그런 곳이다.


 200페이지의 책에는 대략 내 키 두 배 길이의 나무가 들어간다고 한다. 도서관을 통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소극적으로나마 나무를 살리는 셈이 된다. 책 한 권을 여러 사람이 돌려 읽게 되니 나무들도 도서관을 싫어할 리 없다. 그래서인지 도서관 마당에 심어진 나무들은 괜히 더 싱그럽고 기분 좋아 보인다. 물론 이건 내 도파민 과다로 인한 환시이겠지만.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 이사 온 지 5년째다. 이 도시의 도서관에서 우리 가족이 넷이 오늘까지 빌려본 책은 4,867권이다. 대부분 아이들이 본 책이고 우리 부부가 대출한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더 오래 살았던 이전 도시에서도 지금과 비슷하게 도서관을 이용했다.

난 콩 열 알을 한 번에 정확히 세는 것도 어려워한다. 도서관 덕에 대략 몇 그루의 나무를 아꼈는지 짐작해보는 건 일찌감치 포기해야겠다. 도서관 신세는 많이 졌지만 나무에겐 덜 미안하게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진 못했다. 읽을 책이 너무 많고, 궁금한 책도 산더미이다. 책 앞에 서면 참 설렌다. 설레는 내 마음에 하이파이브를 하듯 다가오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엔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아니 어떻게 이런 사실이, 아니 어떻게 이런 문장을' 이란 생각을 하며 북다트를 마구 꽂는다(북다트는 종이에 손상을 주지 않음). 책 읽기를 마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북다트가 꽂힌 곳의 문장을 발췌한다. 도서관 책은 2주 동안만 내 것이다. 언제고 다시 들쳐보기 위해선 기억하고픈 부분을 꼭 발췌해놔야 한다. 자음과 모음을 꼭꼭 눌러 발췌하며 문장들을 천천히 다시 읽는다. 꼭꼭 씹을수록 단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녹말 같은 문장들이다.


반면, 읽다 보면 등과 뒤통수를 의자에 턱! 던지듯 기댈 수밖에 없고, 한숨도 푸욱 뱉게 되는 책이 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책, 쓸데없이 행간을 펑펑 띄워놓은 책, 근거 없는 주장을 용감하게 펼치는 책, 독자들을 호도하거나 공포감을 조성하여 책 팔이에만 여념 없는 책, 불필요하게 자기 자랑하는 책…. 

종이 한 장에는 나무의 소중한 역사가 녹아 있다. 그 사실을 야속하리만치 몰라주는 책을 대면하면, 학창 시절에 교수님께서 우리가 해 온 그림 과제를 보며 말씀하신 명언이 떠오른다. "이런 걸 그림이라고 그려왔니? 쓸데없이 종이 낭비만 했구나."


살아있던 나무의 팔과 등에는 예쁜 것들이 내려앉았을 거다. 새의 따뜻한 발, 작은 짐승의 배에 난 보드라운 깃털, 작고 작은 꽃가루, 간지럽히며 오르내리던 작은 곤충과 동물, 촉촉한 이슬과 비와 눈, 보드랍기도 야속하기도 했을 변덕쟁이 바람, 귤색으로 빛나는 햇살.

나무는 그런 몸을 부수어 책으로 변형된다. 아낌도 저항도 없이 탈바꿈된 그 물체는 나무의 묘비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묘비명을 적지 못하는 나무를 위해 사람이 대신 글자를 입혀준 물체. 나무가 살아있을 때 내려앉았던 것들 만큼 아름다운 것들을, 죽은 나무의 살결에도 조심조심 앉혀주면 나무도 좋아하지 않을까.


물에다가 '고마워요, 사랑해요' 같은 아름다운 말을 노출한 후 얼리면 예쁜 결정이 되고 나쁜 말을 노출한 후 얼리면 못생긴 결정이 된다는 유명한 주장이 있다. 최근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2018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목재 물리학 관련 연구를 시행했다. 똑같은 종이 두 장에 아름다운 단어와 부정적인 단어를 각각 적은 후 똑같은 양의 빛을 비춘다. 연구 결과, 아름다운 단어가 적힌 종이에서 미세하게 더 많은 빛이 반사된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물론 뻥이다. 내가 방금 지어낸 헛소리다. '물 → 예쁜 말 → 냉동 → 예쁜 얼음' 이 이야기도 피장파장이다. 일단 지구에는 예쁨에 대한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진 70억 인간이 살고 있습니다만?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류의 사이비 과학 책은 나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책 중 하나다. 나무의 피부가 어떤 개떡 같은 이야기라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준다고 해서 그 너른 포용을 조심성 없이 모욕하는 걸 보면 나는 나무도 아니면서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도서관을 사랑한다고 해서 책을 사지 말자는 주의는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난 좋은 책을 계속 읽고 싶다. 그러려면 당연히 출판계가 호황이어야 한다. 출판 산업의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바란다. 도서관을 애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 한 달에 100권 넘는 책을 읽는데 그걸 다 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우리 가족이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본 후 정말 좋으면 서점에 가서 산다. 마트 갈 때처럼 서점에 갈 때도 구체적인 쇼핑 계획을 적어서 가지만, 그곳에선 마트에서와는 달리 아이쇼핑도 즐긴다. 충동구매를 허함도 물론이다. 그동안 우리 집에서 처분한 어른 책은 10박스가 훌쩍 넘는다. 아이들 책은 커다란 책장 하나 분량 이상을 중고로 팔거나 물려줬다. 그러고도 아직 키다리 책장 6개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으니 책 구매에 인색한 가족은 아니다. 단지 모든 책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 출판계의 창성을 기리는 마음은 진심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제까지고 마음을 울리는 한 권의 책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했다. 그런 책을 찾으러 또 도서관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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