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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Oct 28. 2020

노래와 전쟁의 어디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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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 전쟁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아파트 현관에 메주 콩알 같은 비비탄 총알 수십 알이 뿌려져있다. 전투의 흔적들을 발로 차며 아파트를 나섰다.


남편과 볼일 보러 가는 길. 가을 도로로 진입했다. 노랗게 구워지고 있는 가로수들이 우리 차 옆을 차례차례 지나갔다. 남편은 운전을 하며 '드드드'라는 가사로만 되어 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멜로디는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나도 '드드드' 거리며 따라 불렀다. 적당히 서늘한 공기, 코발트색 하늘, 노릇노릇 한 나뭇잎들과 잘 어울리는 느긋하고 쾌청한 멜로디였다.


노래 부르다 말고 남편이 말했다. "작년 이맘땐 도로 양쪽에 공연 배너들이 가득 걸려 있었잖아요. 올해는 하나도 없네요." 가을 분위기에 젖어 있던 나는 남편의 말에 눈을 떴다. 내가 깨어난 곳은 코로나 매트릭스 속이었다. 여기엔 장윤정 콘서트, 악뮤 콘서트, 조수미 콘서트를 홍보하던 화려한 배너들이 전무했다. 연말이 다가오는데   장의 공연 배너가 없구나. 겨우 1 전의 현실을 이토록 산뜻하게 망각하고 있었다. 낯선 장면을 빨리 알아채지 못한 '다른 그림 찾기' 하수의 입맛이 이래저래 썼다. 바이러스 맹포격을 받은 2020년은 진공의 우주처럼 고요하게 퇴장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남편에게 싱거운 소리를 했다. "우리끼리라도 집에서 공연할까요?" "공연 맨날 하잖아요. 우리  까불이들이." 아이들은 실로폰을 쨍깡쨍깡 두드리거나 후렴구로만 구성된 자작곡 노래를 부른다. 만화 주제가를 개사해 부르며 배꼽을 잡기도 한다. 우리 집에 생기가 유지되는  아이들의 저런 공연 덕분인지도 른다.


어느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아 멈췄다. 반갑게도 횡단보도 옆에 색소폰 공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 좌석 무료 공연, 유튜브 생중계'라고 써 놓았다. 그러고 보니 음악을 하는 사촌동생도 한 달 전에 공연을 했다. 코로나로 인한 무관객 공연이었다. 뭐라 격려하기조차 미안했다. 많은 귀에 가닿아야 할 음악이 청중 없는 공연장에 격리된 세상이다.


아이들과 함께 읽었던 『크리스마스 휴전』이라는 그림책이 생각난다. 1 세계대전 격전지 서부전선에서 1914 크리스마스  실제로 일어난 유명한 정전 이야기가 묘사되어 . 독일군과 영국군은 참호 속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다. 그날 저녁, 독일군  명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노래에 화음을 쌓았다. 그러다 독일 병사가 무기를 내려놓고 참호에서 나온다. 그의 손에는 "쏘지 마라, 우리도 쏘지 않겠다"라고  깃발이 들려 있었다. 양측 군인들은 총을 비운 손으로 적군의 손을 잡았다. 병사들의 노래가 1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중단시켰음에도 그들의 상관은 결국 부하들의 노래를 중단시킨다.  줄기 노래로 시작된 짧았던 크리스마스 정전의 기록은 아름답고 애달팠다.


사람들 틈에서 시원하게 노래 한 곡조 뽑기 어려운 세상이 돼버렸다. 가사도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나마 노래를 끄집어내게 되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전장이야말로 그 어느 곳보다 음악이 필요한 장소이니까. 느긋한 멜로디들은 무거운 일상을 잠시 지워준다. 텅 빈 공연장, 좁은 차 안, 작은 집 안, 모니터 속의 작은 창 안에서 각개전투 중인 노래들. 그것은, 그럼에도 살아가려는 이들을 달래는 노동요이다.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비비탄 총알들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자잘한 총알을 발로 차듯 걸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다다다' 발사되는 총탄이 살갗을 스치는 일상 속으로 '드드드'라는 노래를 부르며 입성한다. 탄식과 낙천의 사이 어디쯤에서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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