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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Nov 25. 2020

코로나 때문에 김장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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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납하러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 입구 3미터 앞에서 나는 저지되었다. 빨간색 볼드체로 '긴급공지'라는 제목이 인쇄된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 휴관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들고 간 책을 도서 반납함에 넣고 점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갔다. 조금 걷고 있자니 문자가 왔다. '11월2X일부터시립도서관임시휴관,자료대출안심예약대출로전환.' 띄어쓰기 없이 보낸 다급한 공지였다. 동네 시장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머리가 꼬불꼬불한 손님들의 대화가 마스크를 뚫고 나왔다. "그래서 그 사람 아내하고 애하고 다 걸린 거지. 애는 저기 S 초등학교 다닌대."


재난 문자는 매일,  번이고 온다. 하루의  재난 문자는 베란다에 햇빛이 걸쳐질 즈음 도착한다. 아무리 빨라도 오전 9시는 지나온다. 그런데 오늘은 재난 문자가 오전 7 32 부터 오기 시작했다. 시간만 봐도 감이 잡혔다. , 재난이구나. 전국적으로 382명의 확진자가 집계된 , 내가 사는 곳에서 19명의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우리 동네의 코로나 확진자 수는 여대에 입학한 남학생만큼 적었다. 수도권이 위태로울 때도 여긴 0명이거나 한두 명의 확진자에 그쳤다. 그러다 오늘, 나의 동네도 코로나 3 유행에 합류한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의 손에는 작게 찢어진 에메랄드 녹색 종이가 들려 있었다. 거기엔 짙은 초록색으로 삐뚤빼뚤하게 'KF94'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었다. "엄마, 선생님이 이거 마스크만 쓰래요." 평소 사용하는 마스크의 포장을 보여주며 이미 그 마스크를 쓰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마스크는 94가 제일 큰 거예요? 99도 있어요? 100은? 1000은?" 아이는 이렇게 물으며 웃었다. 둘째의 광대뼈 부분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아이가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손을 씻고 온 둘째는 가정학습 이야기를 꺼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 오는 게 꺼려지는 학생은 가정학습 신청서를 제출하고 집에서 공부해도 된다고 선생님께서 알려주셨단다. "학교 가면 코로나 걸릴까봐 걱정 돼?"라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오늘 아침에 학교 체온 감지기를 통과하니 38도가 나왔다는 말도 했다. 다른 감지기로 다시 쟀더니 다행히 정상 체온이 나왔다고 한다. 애들 학교의 체온 감지기가 부실하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들었다. 측정 오류가 흔한 일이라 아이도 당황하진 않았단다. 그렇다 해도 오늘은 학교 분위기가 확실히 어수선했던것 같다. 아이는, 옆 블록의 S 초에서 학생 확진자가 나왔다는 이야기, S 초 아이들과 같은 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했다는 이야기 등을 꺼냈다.


그즈음 큰애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큰애의 특징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엄마 있잖아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은 특히 더 했다. 아이가 풀어놓은 학교 분위기는 한층 심란했다.


같은 반 친 구 중 한 명이 결석했단다. S 초에 다니는 확진자와 같은 합기도 학원을 다녀서였다. 그 애는 오늘부터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아이의 검사 결과는 오늘 밤에야 나올 텐데 만약 확진이라면… 우리 큰애도 안전하지 않은 것이겠지. 이런 식으로 자가 격리에 들어간 학생은 다른 반에도 있다고 한다. S 초에는 임시 선별 진료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뒤늦게 우리 지역 코로나 확산 소식을 접한 어느 엄마는 불안한 마음에 자녀를 조퇴시키기도 했단다.  큰애의 입에서 한 다리 건너 다 엮인 좁은 세상이 펼쳐졌다. "S 초 아이들과 같은 학원에 다니는 애들이 많아요, 내 친구의 동생이 S 초 다니는 애랑 같은 학원 다니기도 하고요, 누구는 S 초 아이랑 사촌이고요…." 코로나가 아이들 턱밑까지 왔다. 큰애와 반 친구들은 불안함에 마음이 울렁였나 보다. 코로나 검사 경험이 있는 큰애에게 반 친구들은 유독 질문이 많았단다.


큰애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도 전했다. "김장해야 되니까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계속 앉아있으려니까 엉덩이 아파서 힘들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웬 김장이지. 학교 급식실에서 김장을 하는 건가? 나는 큰애에게 물었다. "근데 김장이랑 가만히 있는 게 무슨 관계야?"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 코로나 때문에 '긴장'해야 하니까 왔다 갔다 하지 말래요." 아, 김장이 아니라 긴장이었구나.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 뜬금없이 너무 웃겼다. 나는 막 웃어젖혔다.


큰애도 학교에서 들은 가정학습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집에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인류가 매우 희귀하다. 딱 한 명 있는데 그게 큰애이다. 이 아이는 학교 가는 걸 사랑한다. "아아~ 난 학교 가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어떻게 하지?" 고민이 되나 보다. 학교보다는 당장 학원부터 문제다. 피아노 학원 갈 시간이 몇 분 뒤로 다가왔다. 큰애의 피아노 학원 바로 옆의 태권도 학원에, 확진자가 나온 S 초의 학생이  다닌다. 몇 미터 떨어져 있긴 하지만 찜찜하다. 일단 집에서 있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서 피아노 선생님께 카톡을 보냈다. 큰애는 학원에 안 가니까 기분이 좋단다. 그 말에 나는 다시 웃었다. 아이다운 말이라서 사랑스러웠고,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했다. 두 가지 색이 섞인 웃음이었다.


조금 뒤 큰애 담임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내일부터 예전처럼 A, B 반으로 나눠서 학교 수업을 진행한단다. 큰애는 A 반이며 월, 화만 등교한다. 수, 목, 금요일은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됐다. 코로나가 확산되던 올 초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둘째의 학급 밴드에도 공지가 떴다. 큰애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아이에게 알리니 "하이고오~"라며 아쉬워했다. 그 소리가 안쓰러우면서도 뭔가 귀여워서 나는 세 번째로 웃어버렸다.


갑자기 학원도 가지 않고 학교도 매일 가지 않게 된 아이들은 마음에 여유가 넘치나 보다. 좁은 거실에 이불을 펼쳐놓고 놀기 시작했다. 숨넘어가게 웃고 푸다닥 거리며 장난친다. 소동이 대단하다. 요란스러운 웃음소리에 나는 머리가 울리고 당최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저 소리는 묘하게 싫지 않다.


그때, 또 재난 문자가 왔다. '3시 21분. 확진자 14명 추가 발생.' 쪼끄만 동네에 하루 만에 난리가 났구나. 하루에 33명의 확진자라니. 나는 새록새록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김장 33포기 정도 분량의 긴장이었다. 확진자가 늘든 말든, 엄마가 긴장을 하든 말든, 아이들은 목소리를 꺾어대며 요란하게 웃었다. 그 소리는 흔들림 없이 강력했다. 문득, 힘의 수치를 김장 단위로 측정하는 '김장 에너지 감지기'가 생각났다. 장롱 구석에서 잠자던 그것을 꺼내어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갖다 댔다. 삐빅-. 에너지의 결과는 '김장 34포기'. 밝은 웃음이 나의 긴장을 이겼다. 애들 웃음에 내 웃음을 보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웃음이 코로나도 이겨낼지(유사과학을 조심합시다).


저녁이 되자 피아노 학원에서 이번 주는 휴원 하겠다고 문자가 왔다. 거리두기를 격상한다는 우리 시의 재난 문자도 왔다. 넉넉한 웃음이 필요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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