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원인을 모르겠다. 가공식품도 딱히 안 먹였는데 왜? 간밤에 둘째 아이의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얼굴에서 발까지 심하게 울룩불룩했다. 두드러기는 시각적으로 꽤 충격적이긴 해도 조금 참으면 가라앉는다. 몇 시간만 견디면 되는데 문제는 가려움이다. 아이는 이미 피가 나도록 긁고 난리 법석이다. 보통 늦어도 10시엔 자는 아이가 12시 넘도록 괴로워했다. 아이를 달래 미지근한 물로만 얼른 씻겼다. 피가 난 곳에 연고를 얇게 바른 후 다시 재웠다. 그래도 계속 가려운지 긁고 또 긁었다. 그때마다 긁지 못하게 하려고 아이 손을 붙잡았다. 간지러워 하는 부위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새벽까지 잠을 못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감사하게도 두드러기가 다 사라졌다. 심하게 긁은 탓에 여기저기에 피딱지가 앉았지만.
피곤한 몸을 일으키려니 첫째 아이가 울면서 다가왔다. 유치 하나가 반쯤 뽑힌 상태인데, 그 부분 잇몸이 너무 아프단다. 동네 치과 가서 뺄까? 물으니 어린이 치과에 가면 안 되냐고 더 운다. 가장 가까운 어린이 치과도 꽤 멀며, 그곳은 예약하지 않으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아이는 고민 끝에 동네 치과를 선택했다.
집 근처 치과에 오픈 시간 맞춰 도착했다. 아뿔싸. 예약환자 아니면 받지 않는다며 우리를 돌려보낸다. 건너편에 있는 다른 치과로 가보았다. 2층에 있는 치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둘째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흔들고 난리다. 다리에 벌레가 붙었단다. 겨우 벌레를 무찌르고 둘째를 달랬다. 치과에 들어가니 여기도 예약환자만 받는다고. (요즘 치과 다 이런가?) 게다가 어린이는 더더욱 안 받는단다. (대체 왜?) 그러면서도 왜 오셨냐고 묻는다. "흔들리는 유치를 빼려고요." 그건 해준단다. (진료 기준이 뭐지?) 무사히 발치를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큰애는 자기가 빌릴 책을 골라 탁자에 착착 쌓아놓았다. 둘째 아이는 수천 권의 책을 등지고서 볼 책이 하나도 없다며 칭얼거렸다. 아이들이 책 고르는 동안 모처럼 우아하게 시집 좀 읽으려고 했는데… 계획 실패. 시집을 덮고 둘째가 읽을만한 책을 골라주었다.
그림책 20권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에게 책 한 권 읽어주고 나니 밥할 시간. 밥과 반찬 만들고, 먹고, 설거지 마치니 오후 2시. 이제 글을 좀 써볼까, 그림을 좀 그려볼까, 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나를 찾아왔다. 사전 예약 없이 당당하게 방문하는 치과 고객처럼. "엄마, 상상의 동물 검색해서 사진 좀 보여주세요.", "엄마 내가 책에서 봤는데요 어쩌고저쩌고.", "엄마 사과 깎아주세요.", "엄마, 내가 만든 미로 풀어보세요.", "엄마, 괴도가 무슨 말이에요?", "엄마 매실차 타주세요." 치과의 예약제에 납득이 간다.
글 · 그림 작업은 아이들 응대하는 시간 틈새에서 종종거렸다. 손으로 쓰는지 발로 그리는지 알아맞혀 봅시다. '집중'은 옆집 강아지 이름이고 '몰입'은 윗집 고양이 이름이려나. 유기농이나 국산이 아니어도 괜찮고 조금 비싸도 눈감아줄 테니 '집중'과 '몰입' 좀 마트에서 판매해 주면 좋겠다. '시간'을 팔면 더 좋고.
오후 5시쯤 되니 잠이 쏟아졌다. 간밤에 잠 못 잔 여파와 하루의 피로 탓인가 보다. 잠깐 누워 눈을 붙였다. 그 사이 퇴근한 남편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한 15분 잤나 싶어 눈 떠보니 6시. 헐레벌떡 일어나 저녁을 차린다. 한숨을 내쉬었더니 "밥 차리기 싫다"란 소리로 자동 번역되어 나온다. 미치도록 시켜 먹고 싶은데 적당한 메뉴가 없다. 외식비도 아깝다. 고된 일 하고 돌아온 남편이 다가와, 비틀비틀 저녁 차리는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서로를 토닥이며 짧고 굵게 전우애를 다졌다. 씻고 썰고 끓이고 졸여서 저녁을 차려 먹었다. 상을 치운 후 나는 설거지를 하고 남편은 각종 쓰레기를 버리며 베란다를 정리했다. 그 후 남편은 업무를 보고, 나는 아이들 공부를 봐주었다.
둘째가 수학 문제집을 풀어왔다. 뭔가 이상하다. 암산 할 줄 모르는 아이인데 계산 과정 흔적이 전혀 없었다. "둘째야, 식을 쓰지 않고 어떻게 풀었어? 머릿속으로 푼 거야?"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둘째. 아이 얼굴이 부자연스럽다. 뒷장으로 넘겨보았다. 더 어려운 문제들. 여전히 답만 깔끔하게 적혀있다. "…둘째야 이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머릿속으로만 풀었어?" 아이는 3초간 침묵하다가 "…답지 봤어요~" 실토하며 대성통곡.
아뿔싸, 내가 이 문제집 답지를 안 뜯었구나.
"둘째야, 공부하기 힘들어서 그랬어?"
"네…엉엉엉엉~"
"그런데 둘째야, 팔도 다리도 쑥쑥 자라는데 머릿속만 자라지 않으면 건강한 어른이 되지 못할 수도 있어. 몸도 머리도 똑같이 자라야 좋거든."
"네에…(훌쩍훌쩍)."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처음에 거짓말 한 건 나쁜 거야."
"네에… 잘못했습니다.(글썽글썽)"
문제집에 적힌 답을 지우개로 지웠다. 꼭꼭 눌러 쓴 탓에 말끔히 지워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면지에 문제를 옮겨 적은 뒤 아이에게 다시 풀도록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둘째의 공부(수학 문제집 매일 한 장 푸는 것. 예습이 아닌 복습. 심지어 지난 학'년' 문제집….)가 끝났다.
둘째를 씻기고, 큰애 공부 봐주고 나니 잘 시간이 코앞. "어젯밤에 잠을 설쳤으니 어서 자"라고 했다. 그런데 큰애가 둘째에게 자꾸 장난을 건다. 동생더러 오라 가라 주문이 많다. 그 덕에 둘째의 이불은 꽃봉오리 개화하듯 처언처언히이 펴지고 있다. 큰애를 불러서 "동생 잘 준비하도록 내버려 두고 너도 빨리 자"라고 했다. 큰애는 뭔가 서러운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
아아… 몰라. 나도 이제 지친다.
우는소리 그만 듣고 싶어.
제발 나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줘.
울음소리로부터 도망가려고 노래를 틀었다. 시끄럽게 틀었다. 망연한 기분으로 앉아 마우스 휠을 의미 없이 팍팍 굴렸다. 남편이 큰애를 달래고 나도 토닥여주었다.
드디어 아이들이 잔다. 온통 조용하다. 욱했던 내 마음도 고요해진다.
이제 좀 글과 그림을 건드려볼까 하고 폼을 잡아보려는데 투명한 밤 하늘에 우주가 비치고 있었다.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마침표가 무수히 찍히기 시작한다. 큰애와 둘째의 하루는 하늘 저쪽 구석에 반짝거리는 종지부처럼 콕콕 찍혔다. "너도 빨리 자"라며 별들은 눈치도 없이 내 등을 떠밀었다. 벌써 밤이라니. 토요일이 이렇게 가버리다니. 해가 반칙을 했거나 달에게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벌써 밤이면 나는 어떡하라고. 겨우 맞이한 소중한 시간에 집중도 몰입도 못하고 있다. 낮에도 밤에도 종종거리게 된다.
메리 파이퍼는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누구나 타고난 조건, 방해 요인, 삶의 교훈을 깨닫게 해주는 일 같은 제약 속에서 글을 쓴다… 성공이란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다. 우리가 재능을 낭비하지 않았고 책임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내 일상과 아이들을 '제약'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게 몹쓸 짓 같지만 글과 그림의 입장에서 말하면 사실이긴 하다. 글 · 그림 작업은 내가 최우선의 일을 하고 남은 에너지를 주워 먹고산다. 가장 묵직한 책임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벌써 밤이면 나는… 점 하나라도 찍는다. 글의 일부인 마침표로써, 그림의 일부인 작은 흔적으로써 그거라도 찍는다. 오늘도 요것밖에 못했다. 그렇지만 꽤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