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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17. 2020

골절 2_나의 처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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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 이어)


모양이 변한 발등이 생소했다. 문턱에 걸려 넘어졌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급성으로 부어오를 일인가. 뭐 이런 혹이 다 있지. 비죽한 보형물이 순간적으로 발등에 삽입된 기분이었다. 통증도 남달랐다. 부딪힌 것치곤 지나치게 아팠다. 발등의 모양과 통증보다 당황스러운 건 내가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스트레스 과다 상태가 기본 값인 사람이어서 내가 문제를 더해줄 필요가 없었다. 열여덟 살인 나도, 문제는 문제집에 있는 걸로 족했다. 1분 1초를 아껴 학업에 전력해야 하는 시기였다. '놀기', '정신적 방황하기', '아프기' 같은 게 금지된 인류, 대한민국 고딩이었다.


아픈  참으면 되는데 붓기는 가려지지 않았다. 엄마가 나중에  발등을 보고 뭐라고 하실까. 스릴러 영화의 긴장된 신에  있는 인물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배역을 무르고 싶다는 생각만 거셌다.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우뚝 솟은  등을 양손으로 꾹꾹 눌러봤다. 아팠다. 아프든 말든 이런 기형의 발등은 있어선 안됐다.  차례 눌렀지만 높이 변화가 전혀 없었다. 속으로 '어떡하지?' '발이  이러지?' 교대로 중얼거리고 있을 , 엄마가 깼다.


변신한 내 발등을 본 엄마의 첫 표정을 나는 모른다.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다. "살짝 넘어졌는데 발등이 좀 부었어요…." 아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나도 눈치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자주 아팠다.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부터 아팠다. 몸집은 컸지만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때마다 엄마의 간호 아래에서 나는 괜찮아졌다. 뚫린 입천장이 막히고, 거대한 종기가 사라지고, 아토피가 아물고, 화상 피부 위에 새 살이 돋고, 찢어진 살이 붙고, 축농증이 나았고, 이질이 치료됐고, 거의 모든 치아가 수선됐고, 셀 수 없이 열이 내렸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는 건 거의 나의 일상이었다. 내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만 해도 엄마의 신경은 곤두섰다. 엄마는 내가 아픈 걸 지긋지긋해 했다.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엄마는 찜질해보라며 뭔갈 주셨다. 얼음찜질인지 온찜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주신 그것을 발등에 한참 댔다. 부기는 가라앉지 않고 발등 색만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통증은 선명하고 얼얼했다.


다음날 엄마는 아파트 위층에 사는 지인에게 나를 보냈다. 수지침을 놓는 분이셨다. 그때 내가 수지침을 맞았는지 족지침을 맞았는지 무슨 뜸이라도 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단으로 위층까지 올라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기억만 난다. 절뚝 절뚝 걸으며 최대한 오른발에 힘을 덜 주었는데도 뜨끔하고 욱신거려서 보통 곤란하지 않았다. 침인지 뜸인지의 시술이 끝난 후에도 발등 모양이나 통증은 그대로였다. 피부만 점점 보랏빛으로 바뀌어 갔다.


세 번째 수로 엄마는 나를 정형외과에 데려갔다. 소아과, 내과, 치과, 이비인후과, 안과, 피부과, 외과에 이은 새로운 과였다. 걸어가도 10분이면 갈 거리를 택시로 갔다. 컴컴하고 오래된 로비와 더 컴컴한 길쭉한 복도를 지나 진료실에 들어갔다. 더 더 컴컴한 필름에 발 사진도 찍었다. 의사선생님이 사진을 해석해 주셨다. "뼈 부러졌네요." 아, 살이 부은 게 아니고 뼈가 솟은 거구나.


죽음이나 암을 받아들이는 5단계에 어찌 작은 골절을 빗댈까만은 진찰 결과를 듣고 내가 보인 1단계 반응 역시 '부정'이었다. 7kg짜리 쇠 아령을 발등에 떨어뜨린 게 아니었다. 시집 한 권 두께가 될랑 말랑한 문턱에 걸려 넘어진 게 전부였다. 뼈가 이렇게 시시하게 부러진다는 게 얄궂었다. 접시 물에도 빠져 죽을 수 있다는 선조들의 지혜는 얼마나 대단한가. 몸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들이 1900년대 말을 사는 나의 도처에도 널려있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고들 하는데 골절을 받아들이는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부정-수용-자책-분노-침묵' 이었달까.


골절 진단을 들은 엄마는 어이없어 했다. 기다란 논평까진 안 했지만 "어이구~" 정도의 감탄사를 발사했다. 나도 어이없었다. 발등에 대한 걱정과 통증의 성가심 탓이 아니었다. 또다시 짐짝이 된 나 자신 때문이었다. 도드라진 발등처럼 툭 튀어나온 민폐 인간이 되어버린 게 면목 없었다. 조용하고 묵묵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내면화된 나에게, 최고치의 채도를 과시하는 쨍한 초록색 깁스는 실패의 상징물이었다. 패배감이 들었다. 멀미 같은 '자책'이 울렁거렸다.


'분노'는 '자책'보다 한 톤 진했다. 목발을 짚으며 집에 도착한 후 나에게 엄마와 오빠는 한 마디씩 했다. 네 몸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발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겠냐. 차에 들이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문턱에 걸려서 그렇게 되다니, 어유 쯧쯧. 나도 내가 바보 같았지만 저런 말로 마음까지 부러지긴 싫었다. 뼈가 부러졌을 때조차 '날씬함'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고운 격려를 받을 수 있음을 처음 알게 됐다. 역시 '날씬함'은 만능이구나, 차에 치여서 다쳤다면 놀림감은 안 될지도 모르겠네,라는 이치를 깨달았다. 괴상망측한 대우와 논리에 '분노'했다.


그럼에도 내 최종 반응은 '침묵'이었다. 어려서부터 이 집에서 나는 발언권이 없었다. 일상적이거나 웃긴 이야기를 하는 건 허용됐다(그러나 수다스러우면 안 됨). 반론을 제기하거나, 불만을 표시하거나, 어떤 식이든 부정적인 말을 한다거나, 나만의 도드라지는 생각을 말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거부되었다. 엄마와 오빠의 비웃음에, 밟힌 지렁이처럼 내가 꿈틀거리기라도 했다면 '유머를 다큐로 받냐,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내 말이 뭐가 틀렸냐, 됐다 됐어' 등의 2차 공격을 얻어맞을 게 빤했다. 승산 없는 싸움에서 나의 처세술은 묵묵부답이었다. 무례한 말의 울타리에서 그렇게 사회화됐다.

한편, 이번엔 정말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엄마의 낮잠을 사수하는데도, 내 몸을 제대로 간수하는데도 실패했으니까. 실패자는 소소한 빈정거림을 받아도 싸다는 규칙이 내가 사는 공간을 채운 대기였다.


그리고 나 역시,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을 엄마에게 한 적이 있다. 싸가지 없는 말이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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