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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Dec 19. 2020

골절 3_왜 그따위로 물어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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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 이어)



그때가  시였는지 모르겠다. 시계를  정신이 없기도 했고 내가 시계를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얀 벽지가 까맣게 변한 밤이었다.  기억의 투명도를 다른 기억들과 대조해봤을  대략 6,7쯤이었던 걸로 짐작한다. 엄마, 오빠, 내가 안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빠는 출장 가셨는지  장면에서 빠져 있다.


엄마는 그날도 가위에 눌렸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엄마의 가위눌림 증상은 소리로 드러났다. 목에 걸려있던 바위가 심한 압력을 참다못해 튕겨져 나오는 소리. '으어억! 어억! 으아아!' 로 받아적을 법한 소리였다.  나는 곧 잠에서 깼다. 오빠는 깨지 않았다. 엄마의 '어억!' 거리는 소리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몇 초씩 간격을 두며 괴로운 음이 툭 툭 이어졌다. 평소에는 오래지 않아 가위눌림이 끝나서 엄마 스스로 다시 잠들거나, 아빠가 엄마를 흔들고 토닥여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그날은 엄마의 고통을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자는 척 누워있던 나 말고는.


엄마를 괴롭히는 저 가위눌림이 어린 나에겐 공포였다. 수면마비라는 이름은 다 커서야 알았지 가위눌림이라는 명칭도, 그것의 증상도, 증상이 발생하는 시간도 모두 겁났다. 평소에 엄마의 수명을 내 멋대로 계산하던 터라 가위눌림은 더 무서웠다. 여기저기서 스트레스를 받던 엄마는 그때그때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끝없이 화를 폭발하고 소리를 지르는 다혈질인 엄마는 맹렬한 활화산 같으면서도 한쪽이 박살 나서 내용물이 콸콸 쏟아지는, 곧 바닥 날 독 같기도 했다. 엄마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생명이 줄줄 새나가는 것 같았다. 한글을 모르고 시계를 못 보던 나였지만, 저런 식의 생활이 육체에 해롭다는 것쯤은 알았다. 엄마의 가위눌림은 나의 추론을 뒷받침하는 나쁜 증후로 보였다. 한밤중에 별안간 분출되는 드라마틱 한 엄마의 외침은 몸이 고장 났다는 확실하고도 슬픈 알람 소리로 바꿔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밤마다 '아, 오늘인가, 오늘이 엄마의 끝날 인가'라며 떨었다. 그때마다 방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검은색, 밴타블랙이 되었다.


엄마가 죽는 건 싫었다. 엄마가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런 엄마가 없어지는 건 더 무섭고 더 두려웠다. 왜 오빠는 잘만 자는 건가. 어떻게 저 소리를 듣고도 깨지 않는 건가. 내가 뭔가 해야 하는 걸까. 아빠가 하듯 엄마를 흔들어 깨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깨우면 괜찮아진다고 알았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만지는 것조차 어쩐지 너무 무서웠다.


총명하지 않은 머리를 팽이 후려치듯 돌리던 나는, 마침내 벌떡 일어났다. 엄마에게 가는 대신 안방 전등 스위치로 갔다. 불을 켰다. 형광빛이 눈을 퍽 치듯 들어왔다. 내 눈조리개를 급히 조정해서 엄마를 살폈다. 엄마의 표정은 찡그린 얼굴이었다가 흰자위만 슬쩍 보이는 눈이었다가 부자연스럽게 버둥거리는 팔이었다. 가위눌림에서 반쯤 풀린 엄마가 말했다. "…왜? 뭐야? 불 꺼… 불 꺼~!"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엄마가 제대로 살아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달달거리는 입술로 물어보았다.


"…엄마, 아침에 빵 줄 수 있어요?"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표정을 순간 일그러뜨리더니 피곤하고 짜증 나는 목소리로 "알았어, 알았어, 불 꺼~"라고 했다.


일단은 안심이 됐다. 내일 아침에 엄마가 빵을 준다고 했다. 그때까진 엄마가 살아있을 거란 소리다. 낮엔 가위눌리지 않으니까 아침까지 살아 있다면 내일 하루 종일도 살아 있을 거다. 적어도 내일 잠자기 전까진 엄마가 죽지 않겠구나.

동시에 이날 이후 평생 떨치지 못하게 될 자괴감도 얻었다. 왜 그따위로밖에 못 물어봤지? 왜 그런 식으로 말한 거지? "엄마, 괜찮아요?"라고 물어보기엔 우리 사이가 서먹했다. "엄마, 지금 죽어가는 거예요?"라며 '죽음'을 입에 올리는 건 무서웠다.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어른들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부담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걸. 조용히 불 끄고 잘 걸. 뜬금없이 웬 빵 타령을 해버렸을까.


고소한 냄새에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살그머니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 우유와 잼, 과일이 놓여 있고 엄마는 프라이팬으로 식빵을 굽고 계셨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소한 마가린 냄새와 라디오 소리가 시치미처럼 집을 채웠다. 우리 집 아침 메뉴는 항상 빵이었다. 반찬으로는 땅콩잼과 딸기잼, 치즈나 햄, 캐요네즈에 버무린 양배추 샐러드, 계란 프라이 등이 올라왔다. 우리 가족 모두 이런 아침을 좋아했다. 온통 알록달록하고 달콤하고 고소하고 짭짤하고 아삭했다. 그걸 만들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은 무표정하고 씁쓸하고 묵묵했다.


그날 오후에 엄마와 외할머니 댁에 갔다. 그때쯤 나는 간밤의 기억과 자괴감에서 벌써 멀어지는 중이었지만, 엄마가 자신의 엄마에게 하는 말은 나에게 어젯밤의 기억을 이식하는 봉합사였다. "어젯밤에 내가 가위눌렸거든. 근데 쟤가 불을 켜더니 아침에 빵 줄 수 있냐고 묻더라고." 엄마는 나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어이없고 허탈하다는 눈매와 입꼬리. 외할머니도 피식 웃으시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또 그러거든 옆에 가서 흔들어주면 돼. 다음엔 그렇게 깨우거라, 알았지?"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하고 자리를 피했다.


엄마이자 주부로서 밥하는 사람이 된 나는 엄마의 김빠지는 웃음을 이해한다. 날이 갈수록 사무치게 이해한다. 내가 하던 다른 일의 집중을 끊어내고 부엌에 들어가는 건 매끼 예약된 내적 전쟁이다. 밥하기 싫고, 피곤하고, 재료를 다듬는 게 귀찮고, 메뉴를 기대하는 아이들의 눈치가 보이고, 뭐 먹어야 할지 막막한데 어쨌든 뭐라도 당장 차려야 한다. 가족을 섬길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되풀이되는 의무적인 노동이 진심으로 지친다. 둘 다 100 퍼센트 진심이다.


나는 우리 가족만 돌본다. 엄마는 자기 가족을 넘어 시댁 가족, 친정 가족들 뒤치다꺼리까지 하셨다. 엄마는 그들에게 밥해주느라 죽도록 피곤해서 밥 먹듯이 가위에 눌렸다. 나는 가위눌리는 엄마에게 대고 또 그놈의 밥 타령을 했다. 여서 일곱 살이라고 해서 다 나처럼 사리분별 안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 나이 때에 또렷한 언어로 나를 걱정해 주고, 만져주었다. 아이들의 혀 짧은 사랑의 말을 들을 때 나의 싸가지없던 물음이 떠올라서 부끄러웠다. 바보 같은 내 질문을 생각할 때마다 목이 콱 막힌다. 왜 나는 우리 아이들처럼 말하지 못했을까. 그 날로 돌아가서 끝도 없이 어리바리하던 나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다시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꼭 이렇게 말할 거다.


"엄마, 아침밥 같은 거 안 해줘도 되니까 내일 아침까지 꼭 살아서 오래오래 늦잠 자세요."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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