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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커피 전쟁 11화

커피 전쟁

11. 기범과 영선

커피가 없으니까 일할 맛이 안 나네.





아. 우울증 걸리겠어.





실제로 커피가 없어지면서 우울증 환자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말도 안 돼!





이런 약해빠진 것들을 봤나!





시원하게 콜라를 들이키던 기범씨 얼굴에 또 주름이 잡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식후땡을 그리워했다.





식후땡 커피.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별다방에 가고,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벽다방에 가고.





그렇게 맘대로 식후 커피를 즐기면서 오후 업무를 준비하던 때를.





또는 회사에 가기 전,





아니면 학교에 가기 전





테이크 아웃 해서 한 손에 폼나게 커피잔을 들고 등교, 또는 출근하던 그 때를.





아,





이건 마치 흑백사진 시절같잖아!





라떼가 좋았지.





절로, 라떼가 좋았지를 소환하는 그런 마법의 단어.





식후커피.





이제는 꿈도 못꿀 일이었다.





하루에 한 잔 하는 걸 사먹는 것도 손이 벌벌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커피 한 잔이 이만원으로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이만원.








누가 선뜻 이만원을 주고 커피를 사먹을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이건 아니야.





하지만 마시고 싶어.





미춰버리겠네.





사람들은 지난날을 그리워했다.





아. 그때가 좋았어.





그때는 좋은 줄도 몰랐는데.





지나보니 그때가 천국이었어, 이러면서 말이다.





영선씨의 커피라이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매일 커피를 즐기던 영선씨는 슬프게도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영선씨의 월급은 250만원.





그런데 매일 커피를 마신다면, 60만원이 소비된다.





오마이갓!





아무리 커피를 좋아하는 영선씨라도 한 달에 육십만원을 지출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영선씨는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두세번 밖에 먹을 수가 없다.





그게 최대치이다. 영선씨가 먹을 수 있는.





예전에는 커피를 거의 달고 살다시피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영선씨의 예전 커피 라이프를 보자면





출근할 때 드라이브 스루에서 한잔을 마시고





기분이 내키면 업무를 앞두고 탕비실에서 또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 시간에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식후 커피로 자연스럽게 별다방에 가고.





그리고 틈틈히 졸릴 때마다 탕비실에 가서 커피를 타마셨다.





하루에 다섯 잔은 마셨던 것이다.





믹스커피와 아메리카노를 합쳐서.





그런 영선씨가 이제는 일주일에 두 세번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는 없게 된 것이다.





오마이갓!





탕비실 내 규칙도 강화되었다.





아, 치사하다. 치사해.





사람들은 치사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탕비실에서 먹을 수 있는 커피는 하루에 한 개로





제한이 되었고 씨씨티비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설마, 씨씨티비 확인까지 하겠어.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차마 커피 두개를 먹지는 않았다.





씨씨티비를 의식해서였다.





이 소심쟁이들!





하지만 회사원들은 원래 그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커피 순례길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전국에 쟁여놓은 스페셜티 커피가 이제 거의 동이 난 것이다.





오호라~





이제 콧노래를 부르는 쪽은 기범씨가 되었다.





다시 예전처럼 느긋하게 일요일 드라이브를 즐기며 사랑하는 어머니를 뵈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오 좋아. 좋아.





역시 내 말이 맞았어.





그놈의 커피타령하는 사람들 때문에 도로에 차가 꽉 막혔던 거라니까.





그치? 그치?"





눈치도 없이 기범씨는 옆자리에 앉은 영선에게 말을 걸었다.





부글부글.





그 말을 듣는 영선씨의 속은 끓고 있었다.





마치 화산 속의 용암처럼 말이다.





예전이라면 시어머니를 뵈러가기 전 미리 별다방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사먹으면서





여유를 즐기거나,





아니면 드라이브 스루를 통해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커피를 마시면서 남편 차를 타고 시어머니 댁에 갔을 텐데.





이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한잔에 이만원?





자기 그걸 사먹고 다니는 건 아니지?"





이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기범씨라는 남편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커피를 사먹는 게 이렇게 눈치 보일 일이 될 줄이야.





그런 남편한테





"시어머니 댁 가기 전에 커피 한잔만 사줘. 아니 내 돈으로 사먹고 갈게."





라고 말한다면 '생각이 있니 없니' 하면서 더욱 영선씨 마음을 괴롭게 할 게 뻔했다.





이 작자는 그런 작자였다.





그러고도 남을 작자였다.





그래서 영선씨는 다른 데에서 지출을 줄여가면서 한 달 삼십만원, 커피비를 마련해야 했다.





기분 내키면 질렀던 쇼핑을 더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영선씨는 쇼핑몰 앱을 지워버렸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럴 때 지르면 다시 기분이 좋아지던 쇼핑.





하지만 그마저도 사치가 되버린 것이다.





이렇게 커피 구하기가 어렵게 된 시기에는.





영선씨는 기범씨가 룰루랄라 하는 게 꼴보기 싫어 죽을 것 같았다.





"그만해라."





영선씨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 얼마나 좋아. 이렇게 쾌청한 날, 드라이브라니!





이랬어야지. 음. 진작에 이랬어야지."





아니, 이 인간이 정말.





제정신인가.





사람을 약올려도 정도가 있지.





영선씨는 슬슬 분노 게이지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





좀만 더 하면 확 그냥 폭발하고 말 것 같은 이 느낌이 오고 있었다.





안돼. 안돼.





영선씨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신혼 여행으로 다녀온 파리의 노천 카페에서 마시던 에스프레소.





기범씨와 한창 불붙어서 연애할 때 다니던 커피숍들.





주로 단 게 들어간 마끼아토를 주로 마시던 기범씨 커피까지 빼앗아서 먹던 그 때.





그때는 이 인간도 이렇지 않았는데.





내게 항상 빙그레 웃어주기만 했는데.





아, 참......결혼이란.





그래, 참자 참어.





"그런데 자기야."





갑자기 영선씨에게 기범씨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자기 요새 커피 끊었잖아.





그러면 예전보다 여윳돈 좀 더 생겼겠네."





지금 무슨 소리 하려는 거지.





이 인간이.





기범씨는 영선씨가 커피를 아예 끊은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선씨가 몰래 월 삼십만원치 커피를 사먹고 있다는 건 생각치도 않고 있었다.





그 정도로 생각없는 여자는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그들의 전세 만기가 도래했다.





오마이갓!





집주인은 그들에게 이천만원 인상을 요구했다.





이런 젠장.





기범씨는 내심 그 돈을 마련하는 걸 부담스러워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에 던진 질문이었다.





커피 끊었잖아, 그럼 여윳돈 좀 생겼겠네, 라고.





그는 영선씨가 아직도 커피 마니아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영선씨는 뜨끔했다.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기지.





"그건 왜?"





그러자 아까보다 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기범씨가 물어왔다.





그들은 각자 월급통장을 관리하되, 얼마간 월급통장에서 돈을 각자 내서 그 돈으로 공과비며 필요한 비용을 충당했다.





"월급에서 내는 생활비 말야.





그거





좀 더 줄 수 있어?





우리 이제 전세비도 올려야 하잖아."





이런 XX.





영선씨는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함을 유지해야 했다.





그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금의 상황이었다.





"자기 한 달에 어머니한테 얼마 드려?"





영선씨는 단도직입적으로 기범씨에게 물었다.





효자인 기범씨는 공식적으로는 삼십만원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오십만원을 드리고 있었다.





영선씨는 그 사실을 이미 감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해왔던 것 뿐이다.





"나? 삼십만원이지.





자기도 친정집에 삼십만원 드리지 않아?"





영선씨는 꼬박꼬박 친정 부모님에게 삼십만원을 드리고 있었다.





끝까지 나한테 거짓말 하겠다는 거지.





영선씨의 속이 또 다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정말 삼십만원 맞아? 더 드리는 거 아니고?





지난 번에 에어컨도 설치해 드렸잖아.





왜 자기만 다 하는데.





자기가 둘째 아들인데 왜 첫째, 셋째 아들들하고 아무 도움도 안 받고 자기만 뭔 돈이 있어서 그렇게 어머니한테 다 해드리는 거냐고!"





드디어 터질 게 터져버렸다.





지난번에 기범씨가 영선씨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에어컨을 설치해 드린 것을 건드린 것이다.





기범씨는 회사에서 나온 보너스로 어머니에게 에어컨을 설치해 드렸었다.





그때에는 이렇게 가는 길이 많이 막혔었지.





그러면서 커피여행가는 사람들 욕을 해댔었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야기라면 거의 발작 수준으로 갑자기 예민해지는 기범씨였다.





엄마가 우리를 키워주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지금 그게 아깝다는 거야?





그럼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이 사시게 놔두라고!





이 여자가.





자기네 부모님네는 에어컨 있잖아.





보다 못해서 설치해 드린 거야.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기범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역린을 건드렸구나, 영선씨는 생각했다.





다시 차 안의 분위기는 급속히 냉랭해졌다.





차 안 에어컨을 꺼도 될만큼이었다.





아. 커피 마시고 싶다.





영선씨는 속으로 백만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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