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무실 풍경
부하 직원을 볶고 있는 김부장.
“이 서무관. 말해 놓은 서류 아직도 안 만들어놓았나.”
“네 죄송합니다."
이 서무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를 하고 있다.
사실 김부장이 만들어 놓으라고 한 서류는 이번주 수요일이 기안이었다. 하지만 김부장은 초고 정도는 지금 나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 서무관은 오늘 출근해서 초고를 만들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김부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난 주에는 뭐하고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만들어 놔!"
사무실 공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사무실 온도가 내려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돌오돌.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따스한 아메리카노가 필요해.
다시 심장을 데우기 위해서는.
그건 김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언성을 높이고 나서는 커피를 한잔씩 돌리면서 다시 부서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드는 게 김부장의 특기였다.
즉,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가면서 쓰는 것.
이것이 그의 특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커피 한 잔에 이만원을 호가하고 있다고.
그러면 부서에 인원이 여덟명이니까 십육만원, 자기까지 합치면 십팔만원.
에이 십팔.
에라이.
김부장 미간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안돼. 안 돼.
더불어 그는 월급을 관리하고 있는 아내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는 끔찍한 애처가이자 아내에게 매달려 사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만 센 척할 뿐.
회사 밖에서 집에서 아내를 만날 때는 순한 양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아내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십팔 만원을 지출한다고.
그것도 출근한지 하루 반나절 만에.
모든 카드 내역이 아내에게 전송되는 김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사실 그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부하직원의 탓이 아니었다.
부부싸움.
그는 어제 부부싸움이란 걸 한 것이다.
커피 때문이었다.
끔찍한 커피 애호가인 김부장은 아내를 설득해 외곽에 위치한 커피숍에 갔다.
아주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무려 사만원을 지출할 생각에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주일에 한번인데 뭐.'
하지만 그의 생각은 메뉴판 앞에 선 아내 때문에 곧바로 바뀌었다.
"가자."
메뉴판을 본 아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이걸 먹겠다는 거 아니지?"
아내는 그에게 재차 물었다.
아내는 커피가 얼마 하는지 세세하게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집에서 살뜰이 살림하고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는 게 김부장 아내의 몫이었다.
"자기야, 우리 바람쐬러 가자."
남편이 이렇게 살갑게 이야기하자 육아에 지친 김부장 아내는 '저거 또 왜 저러나. 애나 봐 주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썩 달갑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실 김부장은 유리 멘탈이라는 걸 아내는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만 센 척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집안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쨋든.
그들은 오랜만에 일곱살 난 아이와 함께 드라이브에 나섰다.
아들은 방방 신이 나 있었다.
어디로 가려는 걸까.
김부장 아내는 속으로 남편의 의중을 헤아려보려고 생각했다.
뭐, 공원에 가서 아이와 놀아주려고 그러나.
"아빠. 나 닌텐도 사 줘."
뜬금없는 아들의 요구에 남편은 허허 웃었다.
"닌텐도 보다 더 재미있는 거 해줄게. 오늘."
그러자 아내의 기분이 슬슬 좋아지기 시작했다.
닌텐도보다 더 재밌는 것을 해주겠다고?
이거 오랜만에 육아에서 해방되겠는걸.
몇 년간의 독박 육아에 시달려온 아내의 기분이 슬슬 풀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내 또한 능력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사내 커플이었고 아내는 육아 휴직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가
아이를 키울 사람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해야만 하는 그런 슬픈 상황을 겪은 여자였다.
그래서 아내의 마음 속에는 한이 맺혀 있었다.
'사실은 내가 더 잘나갔는데. 이놈의 육아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어.'
공유가 나오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펑펑 운 것도 김지영의 마음에 이입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어쩔 방도가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는,
아이는,
약간의 자폐기가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도움과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들의 자폐는 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들은 막 실내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신에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갑자기 '악'하고 소리를 쳤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런 아들과 함께 하는 오래간만의 나들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닌텐도보다 더 재밌는 것을 아들에게 해주겠다고?
남편은 왠일인지 행선지를 아내에게 밝히지 않았다.
"가보면 알아."
남편은 휘파람을 불면서 말했다.
휘파람, 휘파람.
조그맣게 휘파람 소리가 차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보통 기분이 좋다는 뜻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외곽.
응?
뭐지?
이 공장 같은 곳은?
아내는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는 요즘 트렌드인 공장형 커피숍에는 영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공장형 커피숍이라는 것은 한 오층짜리 큰 건물을 개방형으로 개조해서
높은 천정을 가지고 있고 개방감이 있도록 인테리어가 연출된 그런 커피숍이다.
그러니까 층들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 층마다 천정으로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5층짜리 건물에 천정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마치 뉴욕의 뒷골목을 연상케 하듯이 인테리어가 되어 있다. 곳곳에 90년대를 연상케 하는 소품들, 오래된 전축이라든지 또는 공중전화부스들이 놓여 있었다.
또 벽과 계단은 모두 그래피티로 되어 있었다.
Back to 90s.
이게 이 커피숍의 모토였다.
와.
들어서자마자 그 큰 개방감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 그런 구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폐가 있는 예준이가 있었다.
예준이.
오, 안 돼.
아내는 갑자기 아이가 밝아지고 꿈틀거리려는 게 느껴졌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그냥 넘어가거나 아니면 혼을 내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예준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난리,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약.
약이 필요했다.
왠지 그런 조짐이 보였다.
빨간색으로 칠해진 공중전화부스로 막 달려가려는 예준이를 간신히 붙잡은 아내.
"자기 뭐 마실래?"
해맑게 아내를 돌아보는 남편 김부장.
그래, 뭐가 있는지나 보자.
헉.
뭐?
아메리카노가 삼만원?
지금 방금 먹고온 낙지볶음이 삼만원어치였는데 아메리카노 한 잔에 삼만원이라고?
말도 안 돼.
아내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본 김부장에게서 조그맣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놀란 아내의 품 안에서 아들 예준이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악"
소리를 내면서.
그 아이는 빨간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 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오, 안 돼!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어.
젠장.
"가자."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한다면 그도 더 어쩔 방도가 없었다.
아내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내의 능력치를 아깝게 여긴 그가 어떻게든 아내의 퇴사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아내는 단호하게 사직서를 제출한 그런 여자였다.
자기 없이 예준이 교육은 어렵다는 걸 알고 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좋은 곳을 데려와서 보여주고 싶었던 김부장.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이런 젠장.
그들은 싸늘한 공기안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 나 닌텐도."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 예준이가 해맑게 이야기했다.
"우리 예준이 착하지. 응. 알았어."
아내는 뜻밖에도 부드럽게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사실, 요새 닌텐도가 왠말이야.
닌텐도 한 물 간지 오래지.
사실 그들은 집에 이미 닌텐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준이는 괜히 그러는 것이었다.
한가지에 집착하는 건 자폐아의 특성 중 하나였다.
그의 젠장맞을 일요일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출근한 월요일.
그는 부하 직원이 그래도 초안 정도는 만들어 놓았을 줄 알았다.
기안이 수요일인데.
그러자 그는 마음속에 쌓였던 게 폭발했던 것이다.
어제일과 함께.
고함을 지르자 좀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부하 직원을 혼내고 여기서 그만둘수는 없었다.
그는 어조를 바꾸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이번에는 사원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큰소리 내서 다들 미안해요. 다들 각성하고 자 파이팅 해보자는 뜻이었어요!”
“네.”
사람들의 목소리가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조그마한 모기 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부장이 이야기를 하니 뭐라도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사람들은 소리를 낸 것 뿐이었다.
드디어.
김부장이 사라졌다.
휴.
사람들은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저 잔소리.
그리고 제각각 이서무관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서무관님. 부장님이 원래 저런 사람인 거 아시잖아요.”
흐으윽.
어디선가 울음 소리가 조그맣게 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이 서무관이 아니었다.
부서의 막내 서영씨였다.
“커피 마시고 싶다.”
서영씨가 조그맣게 내뱉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뜻밖에 울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전 같으면 이런 사단이 난 후에 김부장이 아니더라도 커피를 돌리며 사원들 기분 전환을 시켰을 텐데, 이제 그런 역할을 해 줄 커피가 없으니.
“정말 일할 맛 안 나.”
“커피……”
영선씨도 간신히 참고 있던 울음을 내뱉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어떤 위안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리고 그 위안은 커피만이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