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환자의 자기 계발

2. 자기 계발은 침대에서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꼴에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라오는 자기 계발 영상은 빠짐없이 보는 편이다. 왜 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꼭 보게 된다. 주먹을 불끈 쥐는 것도 잠깐, 곧 도로아미타불이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늘 본 영상 중에 무시무시한 말이 나왔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인만의 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 마치 수능에 성공해서 의대에 가고, 변호사가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넘을 수 없는 자신만의 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면 인생의 차선이 바뀐다고. 추월 차선으로 말이다.


뭘 더 어쩌라는 말이냐.

그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나는 이렇게 하루하루 살기에도 바쁜데. 살아남기에도 힘이 드는데. 몇 번이나 주저앉고 싶고 사라지고 싶은데.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건가, 싶었다. 그냥 죽으라는 건가.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참 다양하게 어떻게 시간 활용을 하는지가 소개된다. 그 중에서 가장 추천되는 것 중 하나는 새벽에 일어나 시간 활용하기이다. 고양이들과 함께 자는 나는 부지런쟁이 둘째 냥이 덕분에 여섯 시에 강제 기상한다. 둘째는 생체 리듬 때문인지 꼭 여섯 시만 되면 그르렁 소리를 내며 머리 맡을 맴돈다. 나가고 싶다는 소리이다. 시간을 보면 어김없는 여섯 시다.


고양이들이 거실에서 사료를 먹고 한 바퀴 돌고 나면 내면의 갈등이 시작된다.

음. 마의 구간이 다가왔구나.

성공자와 실패자가 되는 마의 구간 말이다.

여기서 자기 계발을 하면 뭔가 남겠구나,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말하는 성공자로 가는 길을 걷겠지?


영어 공부를 해볼까.

유투브 동영상을 틀어 놓고 섀도잉을 하거나 아니면 작년 초에 끊어 놓고 수강을 자체 중단한 인터넷 영어 강의를 들을까.


아님 소설 구상을 해볼까.

우리집 고양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멋진 소설을 쓰는 것을 시작해볼까. 늘 꿈꿔 왔잖아. 고양이들의 모험 같은 소설.

그 때 침대가 유혹을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 침대가 말을 건다.


-더 자.

너는 지나치게 일찍 일어났어. 지금부터 뭔가 활동을 시작하면 이따가 피곤해질거야. 잠은 충분히 자야 돼. 잠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자, 이 포근함을 느껴봐. 이불 속의 포근함. 공부? 그딴 거 필요 없어. 지금 행복하면 돼. 지금 자면 너는 무척 행복해질 거야. 이불 속에서.


이불의 유혹을 거절하기에 이불 속은 아직 내 체취와 온기가 남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 유혹을 거절할 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엄마는 게으름뱅이야.

고양이들에게 선포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역시, 이불 속은 따듯하고 포근하다. 전기 장판이 틀어져 있고 따듯한 공기를 머금고 있어. 안전해.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일어나 보면 아홉 시.

밖은 이미 훤하다. 그리고 몰려드는 죄책감. 자느라 아침 시간을 다 써버렸네. 이래 놓고 성공은 언제 할 거야. 괜히 나 자신에게 화를 낸다. 바보 같다. 일찍 일어나 놓고 다시 잔 사람은 나면서 죄책감은 왜 느끼는 거야. 안 하기로 선택한 사람은 너잖아. 고양이들에게 엄마는 게으름뱅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불 속에 들어간 사람은 너 자신이잖아.


나 자신을 변호해볼까.

안 그래도 세상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어려운지 아나요. 어렸을 때는 이불 속을 박차고 나가 새벽 공부하고 그러는 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이불 밖이 무서워요. 최대한 이불 속에서 머물다가 출근하고 싶어요. 일이 끝나자마자 돌아와서 이불과 다시 혼연일체가 되고 싶어요.


자기 계발이요?
이불 속에서 꿈 꾸면서 나는 나를 치유한답니다.
꿈 속에서 상사를 만나면서 현실 세계에서 상사를 만났을 때의 상황을 미리 연습해요. 그러면 좀 낫거든요.
나에게는 침대가 자기 계발의 장소에요.
우울증 환자에게는 충분히 자고 휴식하고 에너지를 아껴 쓰는 게 중요해요. 나에겐 에너지가 많지 않아요. 에너지를 헤프게 썼다가는 금방 동나버릴 거에요.


그러니 제발 성공이니 자기 계발이니, 그런 거 좀 강조하지 말아주세요. 우리 나라는 너무 성공에 대한 집념이 강해요. 그러다가 지쳐버리는 거잖아요.


그냥 좀 삽시다. 술렁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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