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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02. 2021

걷다, 함께

걷다함께     


다리 위에서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달린다. 야구 모자를 쓴 아빠는 허리를 숙여 달려오는 아들을 두 팔로 듬뿍 받는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몸을 안긴다. 엄마는 옆에 서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일요일, 남편과 저녁을 먹으러 다리를 건널 때 흔히 보는 풍경이다. 나와 남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 없이 그 가족을 지나친다. 난 남편에게 뭔가를 이야기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다. 그 뭔가를 말해버리고 나면 초라해질 것 같다. 맘속으로만 이야기한다.   

‘저 사람들 참 행복해 보여.’     


남편도 나처럼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걸까. 남편은 아이를 볼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참 예쁘게 생겼네, 혹은 애가 너무 시끄럽네,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 남편. 혹시 남의 아이 이야기를 하면 우리의 결핍이 도드라져 보여서일까? 왜 남편은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육아 프로그램을 절대 보지 않을까? 마음 속 어디가 언짢아서일까?

이건 다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 지레 짐작하고 괜히 남편의 속마음까지 신경 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 남편이 세 돌 지난 조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을 때, 가슴에 돌 하나가 쿵 떨어진다. 나 때문에 저 남자는 아이를 포기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만약 다른 여자를 만났더라면 남편은 지금쯤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내세우며 자랑스레 시댁 문턱을 밟았을 사람이다. 어쩌다가 나란 여자를 만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된 남자. 그저 다리 하나를 건널 뿐인 이 시간에 내 안에서는 이토록 많은 생각이 든다. 다 지워야지, 나만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마음을 다독인다.       


영화관 내에 있는 베트남 식당에 도착해 이인 세트를 시킨다. 쌀국수와 소고기 월남 쌈이 함께 나오는 세트 음식이다. 다행히 영화관에는 커플을 대상으로 한 이인 세트가 잘 구비되어 있다. 외식을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참 다행이다. 

여기서도 역시 외식하는 가족을 만난다. 건너편 테이블에 사인 가족. 다섯 살, 세 살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아이들은 테이블 위의 식기를 만지면서 놀고 싶어 한다. 엄마 아빠는 돌아가며 말한다. “성민아, 성우야, 좀 가만히 있어.” 아빠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때뿐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오늘의 음식은 그동안 다이어트를 잘 수행해 온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남편은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따라와 주었다. 월남 쌈에 각종 채소와 불고기를 싸주면서 묻는다. “맛있어?” 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은 날 배려해서인지 자신은 별로 먹지 않고 맛있는 부분은 내게 많이 남겨준다. 이럴 때 남편이 너무나 고맙다. 내가 늘 꿈꿔오던 그런 이상적인 남편과의 저녁 식사를 하는 느낌이다. 

아이가 시끄럽게 떼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연스레 내 시선은 북적북적한 건너편 테이블로 향한다. “아니야, 가만히 있어.” 아빠가 엄하게 말한다. 그렇다고 그만 둘 아이가 아니다. 아빠와 아들간의 사이가 격화될 즈음 그들 역시도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여기 음식이 잘못 나왔는데요?” 아빠는 약간 화가 난 듯하다. “저희는 볶음밥하고 쌀국수 시켰는데 왜 쌀국수만 두개죠?” 아빠가 담당 서버와 이야기하는 그 사이에도 아이들은 저들끼리 소리 지르며 장난친다. “그만!” 아빠가 소리쳐도 들어먹질 않는다. 

‘저런 가족은 갖고 싶지 않아.’ 난 속으로 말한다. 

막상 음식이 나오자 다행히도 아이들이 조용해진다. 

“성우야, 이건 김치가 너무 크니까 아빠가 잘라줄게.”

“그렇지, 잘 먹네. 우리 성민이.”

좀 전의 화내던 모습이라고는 상상이 안 갈 만큼 아빠가 다정하게 말한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아이들은 또 다시 장난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컵에 물을 가득 부어서 테이블을 다 적시고 말았다. 

“으이그, 이 자식들!”

아빠는 달려온 서버에게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얼른 가자.”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다. 그야말로 황급히 자리를 뜬다. 그들이 나갈 때까지 나는 그 가족을 쭉 지켜보았을 뿐, 그 가족, 또는 아이에 대해 남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남편 역시도 그러하다. 그 가족이 나가자 다시 식당 안에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차라리 둘이 살래.’ 난 속으로 다짐한다.      


이렇게 밖에 나와 식사를 할 때면 잠시나마 결혼 전 연애할 때 느낌이 난다. 가슴 떨리면서 그의 앞에서 스파게티를 먹던 날, 포크에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서 숟가락에 얹고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밀어 넣었었지. 지금처럼 입가에 소스를 묻히면서 마구 먹어댈 줄은 상상도 못했던 때이다. 

“입에 다 묻었다.”   

남편은 티슈를 건네며 웃는다. ‘그래, 저 순박한 눈웃음에 빠졌었지. 아직도 날 설레 하는 저 미소. 그와 나의 첫 만남의 순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남편의 눈웃음.’ 

    

건물 밖에 나오자 해는 져서 어둡다. 칼바람이 분다. 다리에는 아무도 없다. 남편의 손을 찾아 꽉 쥔다. 나란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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