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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Jan 03. 2021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오내 탓이오내 탓이로소이다     


남편은 나를 구원할 백마 탄 왕자가 아니었다. 일개 이등병, 언제 적진에 나가 죽을지 모르는 작대기 하나였을 뿐. 

이 사실을 깨달은 건 결혼 후 첫 주말에 있었던 커피숍 사건 때문이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같이 커피 한 잔 하러 가자. 스타벅스 갈까?”

그날따라 왜 그렇게 남편하고 커피를 마시러 가고 싶었을까. 마스다 미리의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이란 책을 보면 딩크족 부부가 주인공인데 거기 남편은 여자가 스타벅스 가자고 하면 절대 거절하지 않는다.

나도 남편과 함께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마도 결혼 전 데이트 할 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난 괜찮은데.”

“뭐?”

혼란이 밀려왔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커피숍에 가는 게 좋다는 걸 괜찮다고 표현한 걸까? 아니면 커피숍에 가고 싶지 않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걸까? 

결혼 전까지는 하루에 두세 번도 커피숍에 같이 가 주던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커피숍 사장님이 우리에게만 별도로 과자를 챙겨줄 정도였다. 난 주로 드립커피나 아메리카노를, 그는 카페 모카나 카라멜 마끼아또를 시켰다. 단 커피를 좋아하는구나. 난 생각했다. 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는 내게 자주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와 함께 커피숍에 앉아 있으면 별 말 없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늘그막까지 이렇게 커피 한잔씩을 앞에 두고 말없이 마주보며 평안하게 함께 하는 모습이 내가 그린 이상적인 결혼생활 중 하나였다.       


“난 커피숍에 갈 때 쓰는 돈이 세상에서 제일 아까워.”


충격적이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

결혼 전까지는 숨기고 있던 진실을 이제야 알았다. 그가 커피숍 갈 때 들어가는 돈을 속으로 아까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기 싫었음에도 할 수 없이 커피숍에 같이 가주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다. 

반면에 난 커피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다. 주중에는 아침마다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만들어 먹는다. 그것도 깨자마자 말이다. 커피를 만드는 건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다. 오른손은 핸드밀 레버를 잡고 왼손으론 몸통을 잡아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뚜껑을 열고 원두를 넣는다. 레버를 돌린다. 손아래에서 커피 알이 으깨어져 가며 커피 향이 피어오른다. 나무문을 열 때처럼 드르륵 소리가 나며 커피가 갈린다. 갈린 커피를 종이 필터에 담는다. 그리고 서버위에 깔때기를 놓고 커피가 담긴 종이 필터를 얹는다. 

나머지 반은 천천히 물을 붓는 행위이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커피가루를 우선 물과 접촉시킨다. 뜸을 들인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중앙에만 살짝 물을 부으면 신기하게도 거품이 봉긋이 올라온다. 간질이듯이 곳곳에 물을 주면 그 부분만이 거품을 낸다. 이제 감질맛나게 물을 적시는 건 그만둔다. 전면적으로 물과 커피가 만날 때이다. 시원하게 고루 물을 주면, 확, 확 거품이 올라오면서 커피가 꽃 모양으로 부푼다. 그리고 서서히 가라앉는다. 가라앉으면서 물이 적셔진 커피 봉우리가 갈라지며 틈이 생긴다. 그리고 서버에는 검은 액체, 커피가 차오른다. 

주말에는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노트북으로 단편 소설이나 일기를 쓰는 시간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때이다. 그런데 커피숍에 들어가는 돈이 제일 아깝다는 남편이라니. 아찔했다.      


게임은 어떻고.     


일하는 학원에서 밤 아홉시쯤 퇴근하고 돌아와 보면 게임 삼매경이다. 부시고 때리고. 그가 하는 게임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캐릭터들 모두 총을 들고 있고 우다다다, 쏘며 뛰어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스타 크래프트를 하는데 이것 역시 편을 먹어 탱크를 타고 상대편을 죽이러 가는 게임이다. 평소 온유하고 얌전한 사람답지 않게 그는 폭력적인 게임을 너무 좋아했다. 그뿐인가. 스피커 밖으로 울려 퍼지는 게임 소리는 그야말로 소음 수준이었다.

“제발 저놈의 소음 어떻게 좀 해 봐.”

그러자 그는 헤드폰을 구해 왔다.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이제 그는 내가 집에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른다.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면 헤드폰을 끼고 게임 중이다. 이미 나란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  

얼마 후에는 ‘닌텐도’까지 집안에 등장했다. 닌텐도가 있어야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풀릴 거 같다는데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닌텐도로는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면서 방해자들을 제거하는 게임과 좀비 게임을 주로 했다. 주말이 되면 초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하기도 했다. 

반면 신혼 초의 난 그에게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냈는지, 소소하고 세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가면 이번에는 핸드폰 게임 중 이다. 한창 게임 중인 그를 붙잡고 “오늘 하루 어땠어?” 하고 말을 걸라 치면 “내일 아침 일곱 시에 나가는 사람 방해하지 마.”라는 말이 돌아왔다.      

엄마 왜 그랬어요.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나요. 남편을 소개시켜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내가 남자 좀 소개해줄까?”

“누구?” 그날따라 호기심이 일었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다녀간 수리기사인데 사람이 아주 괜찮더라고.”

“어땠는데?”

“A회사 직원인데 세탁기가 고장 나서 불렀거든. 근데 우리 집에 A회사, B회사 세탁기 두 개가 있잖아.”

“그렇지.”

“수리 끝나고 내가 B사 세탁기 위치 좀 바꾸는 거 도와달라고 하니까 번쩍 옮겨주더라고. 싫어하는 내색 하나 없이. 과일 깎아주면서 이야기해보니까 사람이 아주 괜찮더라. 한번 만나나 봐. 너도 심심하잖아.”

그렇게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검정 코트를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던 그. 웃으면 눈이 쳐지면서 눈 옆에 세 개씩 주름이 생겼는데 그게 참 귀여웠다. 

“제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계시죠?”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안정감, 내가 찾던 그 안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는 직업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몇 개 이야기해주었다. 

“시골에 연세 많으신 분 댁에 가면 할머니들이 대접에다가 믹스 커피를 두, 세 개 씩 타주세요. 안 마시자니 성의를 거절하는 거 같고 마실 수밖에 없는데 먹고 나면 배가 부를 지경이에요.”

“수리하러 고객 집에 갔다가 나올 때 보통 음료수를 주시는데 유통 기한을 잘 확인해야 돼요. 지난여름에 확인 안 하고 우유 마셨다가 한참 복통에 시달렸어요.”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나란히 길을 걷는데 그의 발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사뿐사뿐 걷는 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찬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 저녁이었는데 마음이 산뜻하고 가벼웠다. 

그는 볶음밥을 시켰는데 밥알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고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역시 손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젓가락, 숟가락 놀리는 솜씨도 달라 보였다. 나 역시도 조심조심 숟가락질을 했다. 

“다음에 또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그 다음날부터 그는 내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으레 날씨 이야기였다. ‘오늘은 날씨가 맑네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이런 말들. 그리고 ‘주말에 뭐해요?’ 하는 질문이 왔다. 가슴이 뛰었다. 그와 만나는 첫 주말, 우리는 바다로 갔다. 가다가 한 할머니가 히치하이킹을 하고 계신 걸 보자마자 그는 흔쾌히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태워 드렸다. 뒤에 탄 할머니는 우리에게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하고 물었다. 그 말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아서 놀랐다. 

그는 내게 회를 사주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그가 사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회라는 걸. 알고 보니 그는 회를 전혀 못 먹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네 시 반에 학교 일을 마치자마자 날 데리러 학교 앞으로 왔다. 그리고 또 커피를 마시러 단골 커피숍에 가고, 저녁을 먹으러 가고, 그러면서 친해지고, “집 구경 시켜주세요.” 하는 앙큼한 내 말에 집으로 날 초대했다. 

그가 사는 빌라는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안쪽에 개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복도의 희미한 빛을 지나 그는 현관문을 따고 내가 먼저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곧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어딘가에서 뽀글대는 기포 소리가 들려왔다.     


“구피에요.”

소파에 앉아 수조를 보던 내게 그가 말했다. 나는 수조 앞으로 바짝 다가가 물고기를 구경했다. 날쌔고 매끄러운 것들을.  

“여기 꽁무니가 빨간 애 보이죠? 얘가 어미에요. 새끼를 배면 몸이 이렇게 변해요.”

그가 내 곁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그는 수조 옆에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물속에 넣고 그 안에 꽁무니가 빨간 물고기를 몰아넣었다.

“안 그러면 새끼들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다 잡혀먹어요. 수컷들한테.”  

어미는 미동도 하지 않고 통 안에 머물러 있었다. 아랫배가 불룩했다. 이렇게 사려 깊은 주인이라니. 마치 그의 성정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내게 커피 한 잔을 내어주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난 만일의 일을 대비해 예쁜 속옷을 입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마루에서 머뭇대고 있었는데 그는 “이제 집으로 데려다 줄게요.” 하고 말하고 나서 앞장서서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뭐 이런 맹추가 다 있어! 화가 다 났다. 


“기왕 나하고 결혼할 거면 빨리 합시다.”

만난 지 삼 개월 만에 난 그에게 말했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 그 해는 윤달이 낀 해였기 때문인지 봄의 여왕이라고 하는 오월에도 식장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지 오 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그때까지 난 내가 백마 탄 왕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비밀 노트에 적어놓았던, 나를 내 맘보다 더 알아줄 그 사람을. 

바로 그 날, 결혼 후 처음 맞는 주말, 커피숍에 가자고 할 때까지 말이다.  

     

아, 참 그때야 깨달았다. 내가 비밀노트에다가 그건 안 써 놓았구나. 매 주말마다 커피숍에 가 주는 사람, 폭력적인 게임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을 원한다고. 그래서 그런 거구나, 그걸 썼어야지.      


에구,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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