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 일기. 두 번째, 영어 일기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안 좋은 사건이 있었을 때 그 사건을 자꾸 되짚어보는 스타일이다. ‘아, 그때 그 말을 왜 했지?’ 또는 ‘아, 그때 이렇게 쏘아붙였어야 했는데.’ 등등. 잠들기 전에, 목욕을 하면서. 안 좋았던 그 사건을 계속 되짚으면서 그 감정도 계속 가져가는 편이다. 이불 킥은 기본이고 목욕할 때 중얼중얼 혼자 떠들기도 한다.
이럴 때 일기를 쓰고 나면 좀 편안해진다. 일기에 그때 상황을 적고 그때의 감정도 적고 좀 쏟아내고 나면 후련한 기분이랄까. 이니셜로 누군가를 지칭하며 그때 하지 못한 말을 마음껏 적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기의 단점이 있다. 이걸 누가 보면 어쩌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뭔가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 장부처럼 어딘가 깊숙이 숨겨놓게 된다.
영어 일기는 특히 안 좋은 사건, 내가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거나 너무 열받고 억울한 일을 겪었거나 그럴 때 사용하면 좋다. 장점은 이러하다.
첫째, 그 사건을 단순화할 수 있다. 단순화하면, 상황도 객관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영어를 원어민만큼 쓸 수 없는 사람에게 더 좋다. 오히려 영어의 공부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영어단어를 알고 있는 개수가 적고, 그 뉘앙스의 세세함을 모를수록 좋다. 그래야 사건을 단순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다.
왼쪽엔 한국어로 오른쪽에는 영어로 일기를 적어보았어요.
이것은 내가 이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위해 작성한 영어 일기다. 사실 내가 써놨던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싶었는데, 그 내용들이 공개적으로 보여주기엔 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새로 하나 만들어야지 싶어 남편의 도움을 받다가 본의 아니게 다투고, 난 결과적으로 글감을 얻었다. (남편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아무튼 그 티격태격하던 상황을 한국어와 영어로 적었는데 보면 알겠지만 영어가 훨씬 사족이 없다. (영어 일기에 틀린 부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 그냥 올려본다. 이 정도 수준의 사람도 영어 일기를 쓸 수 있으니 용기를 가져보시라.)
한국말로 쓰면 이런저런 부연 설명이 붙게 된다. 나에 대한 해명이 많아서 논점을 짚어가기가 좀 어렵다. 그러나 영어 일기는 그런 걸 쓰기가 좀 어렵다. 세세하게 내 심리를 다 적기 어렵다. 앞서 말한 영어 공부가 짧을수록 좋다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러니 사실 위주로 적게 되고 그것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 내 일기도 한국어 일기에는 내가 왜 아침에 남편에게 물어볼 수 없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길다. 하지만 영어는 사건 전개 위주로 적었다. 그러니 남편보다는 내 잘못이 좀 더 크다는 상황을 인정하기가 쉽다. 이런 점이 영어 일기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한국어는 주어를 빼도 되지만, 영어는 주어를 뺄 수가 없다.
한국어는 좀 모호하다. 우리의 문화 자체가 그렇다. 무 자르듯이 딱 잘라내면 뭔가 매정하다는 느낌이 있다. 물에 술 탄 듯이 술에 물 탄 듯이 서로 어우러지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을 좀 더 좋아하는 문화다. 그러다 보니 주어를 빼도 말이 되고, 서술어를 흐지부지 말해도 뜻이 전달된다. 그러나 영어는 누가 (심지어 그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복수인지 단수인지도 밝혀야 한다.) 뭘 했는지를 정확히 말해줘야 한다. 주어 동사가 꼭 있어야 하고 심지어 제일 앞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사건의 주어가 누군지, 그 주어가 뭘 했는지를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어라는 언어의 특징이 정확하고 명확하다 보니 내 관점도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 부정적인 사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번역기에서 단어를 검색해봤어요
해당 언어를 진짜 활용한 모습을 찾아봤어요
셋째, 당연히 영어 공부가 된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적게 되니 영어 공부가 된다. 지금 이 일기에서도 나는 ‘글감’을 영어로 어떻게 말하나 궁금했다. 번역기에 ‘글감’이라고 적으니 ‘writing’이라고 나왔다. 그래서 글감을 좀 더 풀어썼다. 이야기 소재라고. (우리나라는 한자어가 많기 때문에 그 뜻을 풀어서 쓰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랬더니 ‘story material’ 이라고 나왔다. 사실 나는 ‘material’을 철이나 나무 같은 물건 만드는 재료 등으로 알고 있어서 이 단어가 틀린 거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 나는 구글을 이용한다. 구글에 ‘글감 영어로’라고 검색을 해봤다. 그리고 실제 ‘writing material’이라는 단어를 활용한 문장을 보게 되었다. ‘아 진짜 material을 소재라는 뜻으로 쓰는구나’ 알게 되고 그대로 적용해봤다.
넷째, 부모의 경우 아이들의 일기 쓰기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영어 맞춤법을 틀리고, 단어를 몰라 못 쓰고 이 과정이 딱 우리 아이들이 겪는 과정이다. 이 심정을 이해하게 되면 아이가 일기 쓸 때 맞춤법을 틀리거나 띄어쓰기를 틀릴 때 좀 관대해진다. 또 아이가 일기 다섯 줄을 써 내려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영어 문장 다섯 개를 쓴다고 생각해봐라. 우리 아이들 참 잘하고 있는 거다.
일기를 쓸 때 목적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의 경우는 일기를 쓰면서 내 감정을 쏟아내고 힐링 받으려는 목적이 컸다. 감사 일기도, 영어 일기도 모두 그 과정 속에 있었다. 힘든 순간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이러한 방법들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
영어 일기를 쓰면서 저는 참 답답했어요.
엄청 화나고 신경질나고 짜증나는 감정을 'angry'라고만 쓰려니 미치겠더라고요. 그런데 한국어로 유창하게 감정표현을 하면 본질을 가려버릴 때가 많아요. 사건 전개 내용을 적을 때 일단 angry 화 났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영어는 그렇게 진도를 뺄 수 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영어 일기는 변명 거리를 줄여준다고 할까요? 화 나고 억울한 일일수록 객관적인 복기가 되니까 영어 일기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