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기 전, 결혼한 친구나 선배에게 아이를 키우면 뭐가 좋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 ‘행복’이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육아는 정말 헬(hell)이지만 아이가 웃거나 예쁜 짓을 하면 행복을 느낀다고. 그런데 막상 내가 결혼을 해서 육아를 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이가 예쁜 건 그냥 예쁜 것이고, 내 노동이 힘든 건 그냥 힘든 것이었다. 그 예쁨으로 내 희생과 힘듦이 보상되지 않았다.
이 말은 아이가 예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혹은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예쁘다. 아침에 일어나 내복 바람으로 멋진 포즈를 취하며 ‘엄마 나 일어났어.’라는 제스처를 취할 때도 예쁘고, 두 녀석이 머리를 맞대고 간식을 먹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행복하다.
다만 나의 노동, 번뇌, 희생은 행복, 예쁨, 만족감에 얽혀서 손실되고 보상되는 관계가 아니더라는 뜻이다. 두 부류는 서로 별개의 것이었다. 힘든 건 힘든 거고 예쁜 건 예쁜 것이다.
그렇다면 육아는 그저 고통스럽기만 한 것인가. 가치 없이 나를 깎아 먹는 고된 일인가? ‘아이의 밝은 미래 = 온전한 엄마의 희생’이 성립되는가?
그 질문에도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육아를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건 정말 몰랐을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하니까.
나는 아이를 키우며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 ‘사람’에는 타인도 있고, 우리 아이도 있고, 내 친정 부모나 남편도 있고, 바로 내 자신도 있다. 아이의 행동과 생각을 통해 나는 사람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한 인간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한 해, 두 해 나이 먹어 가며 달라지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육아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인생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면'이라는 키워드로 찾은 pixabay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얼마 전 있었던 일인데 첫째와 수학 문제를 풀면서 아이 머리가 과부하 된 적이 있었다. 문제도 어려웠고 양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좀 쉬라고 했더니 아이가 영어 숙제를 하겠다고 했다. 그 머리로는 더 공부해도 공부가 되지 않으니 TV를 보든, 장난감으로 놀든 쉬라고 했지만 아이는 굳이 굳이 영어책을 펼쳤다. 이런 모습이 대견해 보였을까? 나는 안쓰러웠다. ‘왜 이럴까?’ 이해되지 않는 마음이 첫 번째, ‘지금 공부 많이 시켰다고 나한테 반항하나?’ 하는 마음이 두 번째였다. 그런데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할 게 있으면 마음이 계속 힘들 단 말이야.”
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건 내 모습이다. 너무 힘들고 녹초가 되어서 빨리 쉬고 싶은데도 눈앞에 빨랫거리가 보이면 ‘이것만 세탁기에 돌리고’, 설거지거리가 보이면 ‘몇 개 안 되니까 빨리 하고 쉬자.’ 하면서 또 몸을 움직였던, 그래서 완전히 방전이 되어 뻗어버렸던 내 모습 말이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조금 쉬거나, 미루거나 해도 되는데 앞으로 진행될 일이 눈앞에 보여서 꾸역꾸역 그 일을 했다. 내 일만 했나? 아무도 안 하는 새로 떨어지는 일도 내 일로 끌고 왔다. 그리고 퇴근을 하면 또 육아에 시달리고. 너무 지쳤다. 몸이 아팠다. 그래서 짜증을 내고 늘 화가 났다. 행복하지 않았다. 먹는 것, 자는 것, 배변, 기초적인 내 생활에도 지장을 받았다. 갑자기 아이의 미래가 보여지는 듯 했다. ‘우리 아이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그럼 그때부터 육아의 고민이 시작된다. 아이에게 소확행을 알려줄까, 느림의 가치를 알려줄까, 그래도 공부해야 할 시기니까 성실한 게 좋은 거라고 말할까, 내가 말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텐데 그냥 둘까.
처음엔 이런 성격도 내 육아 환경 때문인 줄 알았다. 내가 하는 걸 보고 배운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우리 둘째를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둘째는 ‘나중에 해.’하면 딱 놓고 간다. 미련도 안 둔다. 그러니 육아 환경이 아니라 타고난 성격 탓이다.
나의 둘째는 나와 정말 다르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왜 저렇게 행동을 하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릴 때는 키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한테서 많이 배운다. 내가 제일 취약한 것이 ‘타인’이다. 타인의 말과 평가, 행동에 상처를 자주 받는 편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자꾸 복기하며 내가 뭘 잘못했나를 몇 번씩 되짚고, 괴로워하고, 또 억울해한다. 하지만 우리 둘째는 심플하다. 다른 사람의 이해하지 못 할 행동이나 말은 그냥 잊어버린다. 모르겠는 타인의 마음을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싫으면 싫은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비난해도 “난 괜찮은데 왜 그런 말을 하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필요 없는 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정말 부럽고 배우고 싶은 자세다.
(출처:픽사베이)
이 모든 것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다면 알지 못 했을 영역이다. 아이를 통해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아이를 통해 나의 깊은 내면을 볼 수 있다. 내가 자란 양육 환경을 짐작하고, 남편의 양육 환경도 예측해 본다. 더 나아가 내 부모의 양육 환경도 어림해 본다. 이것이 타인에 대한 이해이고, 육아에 가치를 느끼는 중요한 부분이다.
나는 아이 없이 사는 딩크족들을 너무나 이해한다. 그들의 선택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 삶을 그들과 비교해 낮출 생각은 없다. 혹은 더 좋은 거라고 부추길 마음도 없다. 사람은 다 다르고, 선택도 다르고, 그 안에서 느끼는 것도 다른 것이니까. 다만 육아를 너무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것을 가치 없는 허드렛일 정도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육아하는 엄마들을 제발 낮춰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 가치와 즐거움을 찾는 그들의 삶을 그냥 동등한 시선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A는 이렇게 살고, B는 이렇게 살고 그냥 그런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