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by 놀닻

그래, 우리는 결국 그럴 운명이었던거지. 시뻘겋게 타들어가다 못해 새하얀 재가 되는 너를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끝을 뻔히 알고도 시작한 것의 결과였다. 옷깃을 붙잡고 발 끝에 채이던 것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걸 다 내줘도 시원찮을 사람이 지하 저 끝까지 무너져내리는 것을 견디는 게 더 큰 고통이었다. 하늘을 채울 만큼 컸던 뒷모습이 잘게 부서져 비틀거리는 조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손도 뻗지 못하겠다.

끝은 정말 허무했다. 뼛속까지 꿰뚫고 있다 생각했던 사람이 다른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항상 띠고 있던 기분 좋은 웃음은 저멀리 달아나고 나를 만지려하지 않았다. 웃고, 안고 속사이며 사랑을 나누었던 그 시간들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표정도 아무 말도 없는 회색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것도 같은데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배도 고프지 않고 네 생각과 후회만으로도 가득 차다못해 모자랐다. 이제는 감각이 헷갈린다. 고장이 났다. 사실 그것조차 필요가 없다. 더 이상 해가 지고 달이 떠도 1분도 움직이지 않는다. 시계는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게 멈춘 것 같아.

미칠듯한 어둠 속에서 가느다랗게 빛이 들어오는 곳에 먼지가 일렬로 떠다닌다. 암막커튼을 잘못 설치해 조그만 틈으로 빛이 새어들게 해놓고는 볼 때마다 자기 생각을 하라며 웃지도 않는 뻔뻔스러운 네가 하나. 읽었던 책을 아무렇게나 꽂아놓고 편집증 치료라며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네가 둘. 제가 누워있는 자리 옆을 탕탕치며 얼른 오라는 네가 셋. TV 밑 서랍 속에 옷들을 채워놓던 네가, 드로즈만 입고 바닥에 엎드려 졸던 네가 이젠 셀 수도 없다.

손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손을 내릴 틈이 없어 그냥 주저앉기로 했다. 기분이 어때? 이죽거리며 주변을 얼쩡대는 것은 나였다. 끝을 이미 알고있던 과거의 나. 거지같다. 찐득해진 입으로 희미한 소리가 새어나오다 점점 그 크기를 더했다. 몸 속에 가득 찬 무거운 돌덩어리를 뱉고 싶었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땡기는 턱뼈와 아려오는 머리가 아픔을 더 했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손 끝에 닿는 모든 것들을 다 끌어당기고 쥐어뜯었다. 뭐라도 붙잡고 싶어. 누가 안아줬으면 좋겠어. 죽을 것 같다. 죽을 것 같아. 차라리 죽어버릴까. 내 장례식엔 와주지 않을까. 그 때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울음을 헐떡거리다 둔탁한 소리에 생각이 멈췄다. 현관문을 탁하게 두드리는 사람은 너일 것이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부서진 후에도 내가 보고 싶어서 달려온거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다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짧은 웃음이 났다. 눈가를 빠르게 쓸어내리고 넘어질 듯이 달려가 손잡이를 돌렸다.

사랑을 맞이하려 웃으며 눈물을 흘리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옆집 아저씨의 말은 더 들리지 않았다. 네가 아니다. 흐릿한 복도 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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