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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an 24. 2023

레즈비언 커플의 설 명절 쇠기

넋두리 들어주세요. 

1. 이번이 세번째 명절이다. 작년 설이 커밍아웃하고 첫 명절(커밍아웃 후 갑작스럽게 진행된 인사)이었고 작년 추석이 있었고, 올해 설까지 세번째이다. 작년부터 지켜본 각 본가의 명절 분위기 및 양가의 자식을 대하는 태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써 본다. 



2. 애인은 파더이슈가 없는 내가 본 유일한 레즈비언이다. 이 집안의 명절 분위기는 거의 대부분 화목하며 명절때 윷놀이나 고스톱을 치면서 크게 즐겁게 논다. 만약에 손님(나)이 져서 돈을 잃으면 어른들이 어떻게든 우리에게 돈을 따게 해주신다. 명절때마다 애인 아버지께 용돈을 받은 것 같다. 애인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어떻게든 공수해와서 해주신다. 사실 해산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부모님인데, 내가 해산물을 좋아한다고 하니 나를 위해서 조기, 문어, 향어회 등 비싼 해산물을 듬뿍 사서 상에 올려주신다. 사실 명절 뿐만아니라 내 생일때도 마찬가지 였다. 항상 애인한테 해주는 만큼 나에게도 대접해 주셨다. (사실 애인 부모님은 우리집 부모님보다 한달 수입도 적다. 두분은 크지 않은 액수의 국민 연금 + 사적연금으로 지내시는데, 자식한테 하는것은 절대 아끼지 않으시는 스타일이다.)


내가 이번 설 명절때 받은 상. 내가 받은 상 중에 조금 소박한 축에 속한다. 



3. 반면 우리 부모님...아버지는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아(2019년 전후로 크게 싸워 거의 안보고 지내고 있는 중이다.) 우리커플은 엄마와 주로 보는데, 이번 명절에 가서 떡국 한그릇, 갈비 한 그릇을 얻어 먹었다. 아 그래요. 엄마들 노동착취하면 안되죠. 근데 엄마 잘 산다. 주택연금 신청하고 매달 괜찮게 연금 받으며 아빠는 지금도 일해서 둘이 합쳐 애인 부모님보다 훨씬 풍족하다. 아, 그리고 작년 12월까지 내가 매달 용돈 드렸다. (내 월급 10프로 정도였고 적지않았다.) 올해 초 부터 내가 안준다고 선언하고 안 주고 있다. 



엄마가 작년 애인 생일을 갑자기 챙겨준다고 해서 갔더니 식사를 대접해줬다. 엄마 답지 않은 베품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식사자리에서 내년 정월에 나의 아버지 칠순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둘다 마음 무거워졌다. 도대체 뭘 하란 말인가? 그리고 나의 애인이 자기 며느리나 되는가? 결혼도 못하는 우리에게 빨대를 꽂으려는 심보를 보여서 마음이 불편했다.


이번 설날에 갔더니 저 '소박한 한상(떡국과 돼지갈비)' 차려주고 아빠의 생일을 챙겨줘야한다고 집에 한번 더 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아빠 생일상 차려서 밥먹고 가라고 하는 건 줄 알고 애인과 후딱 밥먹고 올 요량으로 엄마 집에 갔더니 둘다 외출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어보니 식당에 가자고 하였다. 아연실색했다. 왜냐하면 당연히 밥은 내가 사는것이기 때문이다. (외식이라고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빠 생일(칠순)날에 옵션 두가지 중에 고르라고 한다. 1) 돈 부칠래? 2) 아울렛가서 옷사줄래? 


울며 겨자먹기로 같이 있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1번 선택하긴 했지만, 왜 이런것 까지 해야하냐고 하니까 엄마 왈 'xx(애인 이름)이가 난처할 수도 있잖아.' 라고 한다. 왜 내 애인이 나의 아빠 칠순에 난처해져야하는데요? 

(애인은 나랑 아빠가 이런걸로 개싸움 나면 집안 망신이니까 난처할 수 있을 거라고 해석했다.)



우리 결혼식에 십원 한장 보태줄 것도 아니면서(만약 십원 준다해도 내가 안받음) 벌써부터 시어머니 행세 하려고 하는 꼬락서니가 꼴뵈기 싫어서 당장 연끊을까 하다가 애인이 그래도 참아보자고 해서(애인도 불러놓고 식당 잡아서 당연히 나보고 내라고 하는 모습에 문화충격 받았다고 함.) 참아본다. 내가 왜 미워하는 아버지의 칠순에 돈을 내야하지? 그리고 왜 이 일에 애인까지 엮여야하는 걸까? 


아, 이래서 내가 이 나라를 뜨고 싶었었지. 그러다 실패하고 가부장제 벗어나 보려고 레즈비언만나 동거하는데 여기까지 뻗쳐오는 가부장제 악습에 몸둘바를 모르겠다. 


4. 애인 말로는 '언니 집은 그냥 보통 집 같은데, 아버지랑 밥먹자고 초청해놓고 외식가고, 결국 언니한테 내게 하는 거(뻔뻔하게 카운터 뒤에 서있는 거) 문화충격이긴 했어.'라고 했다. 


우리 집이 다른 집에 비해 그렇게 하극상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당한게 많아서 조금이라도 제스처 취하니까 예민할 수 도 있다는 의견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행동에 화가 난다.



내 애인이 만약 백인 남성이었다면? 애인을 그렇게 편하게 명절에 오라가라해서 돈내라고 하고 칠순 비용 내라고 면전에 얘기할까? 내 애인이 한남이었으면? 



이거 젠더착취임. 


왜냐면 게이가 남성 파트너를 데리고 왔는데 엄마가 이렇게 한다? NO

딸이 남성파트너를 데리고 왔는데 엄마가 이렇게 한다? NO


한남이 한녀를 여친으로 데리고 왔다. 가능

한녀가 한녀를 파트너로 데리고 왔다. 가능  => 이게 엄마의 싱크빅이 놀라운 부분이다.


엄마에게는 자기 봉양해줄 사람이 하나 더 생긴거 아닌가. 그래서 신나서 불러대는거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국여성=레즈비언=딸=며느리=피착취자 라는 위치는 똑같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는 한 똑같다.


가부장제 싫어서 동성결혼 하려고 하는 딸과 그 파트너에게 시어머니 노릇하려고 드는게 너무 소름끼치는 부분이 아닌가. 엄마의 창조 경제, 엄마의 싱크빅 너무 놀라운 부분이다. 만약 이렇게 하나 둘씩 해주면 엄마는 노후 병수발을 내 애인에게 들라고 할 것 같다. 


5.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엄마에게 선을 그어야 한다. 엄마가 선넘는다는 것을 인지 시킨다. 메세지 보내서 칠순 비용은 내가 부담할 테니, 애인 앞에서 그런 말 하지말라고 한다. 주제 넘은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명절에 외식하려면 미리 말하라고 하고 내가 안된다고 하면 내 의사 존중하라고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애인과의 인연도 끊길 것이라는 것을 상기 시킨다. 



평생 엄마를 교육시키는 일이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또 다른 종류의 인연이 생긴 것이니 조금 참고 소중하게 다뤄볼 것이다. 안되면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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