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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Feb 04. 2023

어른이 되었네

내 나이는 세상의 나이로 보면 올해부터 중년에 접어든다. 중년이니 불혹이니 하는 말들이 내 나이를 수식하지만 아직도 나는 나 자신이 완전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주로 직장에서 주기적으로 '실존의 위기'를 겪으며 '이 진로가 내 진로가 맞는지'를 18년째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다. 법적인 성인이 되고 20년이 훌쩍 지난 시점까지 나는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느끼는데 그런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많은 중년들이 중년의 위기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제임스 홀리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에서 마흔이 접어드는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삶의 의미 상실, 신체의 변화, 외도, 이혼 등을 겪는다고 한다. 그 이유를 우리가 진정한 자신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발달 심리학에서는 성인기를 전반부, 후반부로 나누어 전반부는 '안정'이 주요 목표이며 경제적 기반 확립, 가정 꾸리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성인기 후반부인 중년기에는 '의미'를 파고드는 단계로  자아를 재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사티아 도일 바이오크는 '어른의 중력'에서 안정추구와 의미추구는 선형적으로 시간에 따라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안정을 먼저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의미를 먼저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면서 안정과 의미는 명확하게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데이빗 브룩스는 '두번째 산'에서 젊은이들의 삶을 인스타그램 라이프 라고 꼬집으면서 인생의 소명을 정하지 못하고 삶의 요소를 수퍼마켓에서 고르는 것처럼-해외 봉사활동, 여행, 종교 캠프, 스포츠, 인턴십 등의 경험을 쉽게 사고 쉽게 끝내며-결국 정착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다른 유형은 소명(헌신할 곳)을 찾기가 두려워서 학창시절처럼 성인기를 산다. 훌륭한 모범생처럼 직장을 구역구역 다닌다. 그와 반대로 헌신하는 삶은 몇가지 소중한 '예스'를 위해 수천가지 '노'를 할 수 있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위의 맥락에서 본다면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아직 완전히 통합되고 성숙하고 건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평소, 특히 학기말에는,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자신을 속여가며 거짓된 글(부풀린 칭찬)을 쓰며 영혼을 더럽혔다고 느낀다. 그 와중에도 소명이라고 밖에 설명할수 없는 불굴의 정신으로 그 더러운 일을 해내는 교사 동료들을 보며 경외심과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는 진로를 결정하는 십대후반에 소명을 찾기가 귀찮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나 자신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고 대충 정했으며, 위의 심리학자들이 말한 안정추구형으로 성인 전반부를 살다가 실존의 위기를 뒤늦게 겪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은 해결을 찾으려는 신호가 왔다는 의미이며, 더이상 참을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의미를 반증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는 것을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본다면 나는 어른이 되기위해 노력하며 종종 어떤 단계 위를 올라왔다고 느낄 때가 있다. 첫째, 나는 내 소명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한참 전에 더 치열하게 했어야 하는 고민을 이제 진지하게 하고 있다. 내 소명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20대부터 끊임없이 어떤 형태를 통해서 나를 표현하고자 했다. 20, 30대에는 몸으로 주로 표현했다. 재즈댄스, 살사, 탱고 등 춤을 추고 밤을 샜다. 수영, 요가, 스쿠버다이빙, 클라이밍, 마라톤, 자전거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더 섬세한 도구가 필요했다. 몇년전부터 계속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면의 목소리가 더 정확히 표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꿈인데 이것이 내 소명과 어떻게 닿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진실한 마음인 것 같다. 두번째는 내 진로만큼 중요한 배우자 선택에 있어 사회적 압박을 벗어나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2년전에 만난 나의 파트너는 이성애중심적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배우자 상에 가까운 사람을 온전히 나만의 결정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작년에 집을 합치는 것은 헌신에 가까운 결정이었으며 나는 내 결정에 책임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는 인생의 동반자를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따랐기 때문에 만족하며 성숙하고 어른이 되는 하나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요양원에 누워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자신이 완전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럴 것 같다. 어른(成人)이 되는 것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 만큼 이룰 수 없는 목표라고 생각할 수 도있다. 그렇다면 하나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40이 되어서야 대충 방향이 정해진 것 같다. 인생이 재밌는 것은 모두 다른 속도와 다른 관문을 통과하여 성숙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외부의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내면의 자아의 목소리를 찾아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들 즐거운 과정을 겪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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