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경수 May 14. 2023

영어과 교무실 계급도

우리 학교에 영어과 교사는 5명이다. 정규직 4명과 비정규직 1명인데, 정규직 4명은 46세 기혼 남성 (D), 48세 기혼 여성 (N), 40대 중반 미혼 여성(Y), 40살 미혼인지 기혼인지 애매한 나(M), 그리고 비정규직 41살 미혼 남성(J)이다. 우리 계급도는 이렇게 되어있는 것 같다. 맨 위에 비정규직 41세 미혼 남성(J) – 그 다음에 정규직 40대 후반 남성(D) – 그 밑에 정규직 40후반 기혼여성(N)- 그 밑에 40중반 미혼 여성(Y)- 그 아래에 내(M)가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구조인지 설명해 보자.


J는 비정규직이고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1년짜리 계약제 교사이다. 그러나 우리학교에서 그 누구보다 오래 근무한 교사로서 올해로 이 학교에서 근무한지 10년째다. 4년마다 옮겨 다니는 공립학교 영어 교사들은 J에 대해 오래 들어왔다. 이 학교의 마스코트이자 레전드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J가 얼마나 상징적인 존재 인가를 나타내는 것 중 하나가, 우리가 같이 쓰는 영어과 교무실 비밀번호인 2013이다. 이 사람이 학교에서 처음 근무한 연도인 것이다. 이 교무실에서 근무하는 첫날부터 이 사람이 언제부터 근무한 사람인지 알게 되는 구조이다. 이 학교에서 근무하기전부터 이 학교에 근무한 교사들, 또 근무하지 않은 교사들로부터 J에 대한 칭송과 그로부터 입은 은혜에 대해 들어왔다. ‘이 사람이 가르쳐서 얼마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지 모른다, 같이 근무하면서 교사로서 배우는 것이 너무 많다, 그 사람 수업을 보는 것 만으로 연수를 안 들어도 될 정도다’ 등등. J에 대해 한가지 말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온 백인남성 원어민 교사이다. 


올해 3월부터 이 사람과 같이 일하고 옆에 앉게 되면서 들었던 가장 큰 감정은 질투였다. 얼마나 심한 질투였냐면 반삭한 까끌거리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싶은 질투였다. 나는 아침에 7시 50분에 출근해서 담임 조례하고, 수업 준비하면서 행정 업무 수백개를 쳐내고, 방과 후에는 담임 상담을 한다. 이 사람은 8시 20분에 출근해서 자기 수업 준비만 하면 된다. 수업하고 평가를 할 의무도 없다. 그야말로 책임 없는 업무다. 내 행정업무 수백 개 중 하나가 이 사람 행정업무(근태와 수당 등)을 봐야 하는 것이어서 이 사람 봉급도 보는데, 나와 얼마 차이도 안 나는데, 집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10년동안 같은 내용으로 수업해서 자기만의 커리큘럼이 정해져 있다. 얼마나 좋은 삶인지. 


Y샘 빼고 4명에서 같이 근무하는 교무실에서 하는 대화 안에서도 이 계급은 미묘하게 드러난다.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N샘인데 그의 주제는 주로 이비인후과 의사인 남편과 중2인 딸 자랑이다. 그리고 막 늦둥이가 태어난 D샘에게 육아 훈수를 둔다. 원어민 J가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면 모두 말을 멈춰야 한다. 그의 말은 금과옥조처럼 섬겨진다. 내가 끼어들려 치면 N샘이 가로막고 자기가 먼저 반응을 선점한다. 내가 하는 말은 무시당하거나 훈수당하기 좋다. 이렇게 말을 선점하고 있는 N이 2순위가 아니고 3순위인 이유는 N이 알아서 D를 섬긴다는데 있다. D는 N보다 몇 살 적은데, 이 학교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다. D는 좀 조용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한국 남성 치고는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는데, 본지 몇 주도 안된 N이 D를 갑자기 추켜세운 적이 있다. 4명에서 점심을 먹는 상황이었는데 N이 갑자기 ‘D같은 성격을 가진 선생님에게 배운 학생들이 얼마나 좋은 인성을 가지겠냐’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J도 지난 3년간 봐왔던 D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했다. 내 몇 학번 선배인 D는 학교때부터 ‘선비’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남자 선배였는데, 본지 3주밖에 안됐는데도 고결한 인성을 가졌다고 칭찬을 받는구나. 그는 지금껏 3개월간 같이 교무실을 썼는데 한번도 교무실 바닥을 청소한 적이 없다. 설거지는 물론 한 적 없다. 교무실 바닥 청소는 나와 N이 번갈아서 한다. 


교무실을 같이 쓰지 않는 Y가 이 그룹에 끼면 내 계급은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간다. Y는 J에 대해 말할 때 눈이 빛난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J가 개인적으로 연수를 서울에서 듣는데 그 비용을 학교에서 대줄 수 있냐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한국인 교사는 연수비 지원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원어민 업무 담당이어서 행정실, 교감에게 물어보는 동안에 Y가 교무실 밖으로 나를 살며시 부르더니 그 연수비용을 꼭 해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J가 있어서 얼마나 우리가 배운 것이 많은데, 그 정도는 학교에서 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 나는 뉴비니까 이 학교 분위기를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Y를 포함해서 5명이 영어과 회식을 한 적이 있다. 영어과 회식을 2번 했는데 그 때마다 비건 식당이었다. 미국인 J가 비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비건이었어도 이 분들이 알아서 내 입맛에 맞게 식당 찾고 예약하고 그랬을까? 여하튼 그 날은 J와 내가 좋아하는 작은 식당에 갔는데 내가 식당을 예약했다. 다행히 모두 만족했다. 우리가 푸짐하게 잘 먹은 이유는 J때문이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식당 여사장님이 키큰 백인인 J를 알아보고 웃으며 반겼기 때문이다. 여사장님은 나도 알아봤지만 나에겐 함박웃음 짓지 않았다. 이 날 J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N과 Y는 영어로 하는 대화에 열을 올렸다. 나는 원어민 앞에서 한국인들이 열의를 갖고 영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이 불편하다. 시종일관 내 말을 자르는 N을 보며 아예 나는 말을 안하기로 결정했다. 이 날 주제 중 어김없이 ‘해외여행(체류)’가 있어서 내가 틈을 비집고 내 인도네시아 체류기를 말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차안에서 N이 갑자기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자기, 외국에 많이 다니지? 나도 전의 학교에 샘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40대 후반 미혼이고 방학마다 외국 다니고 그랬어. 근데 학교에서 미혼이라고 자꾸 이 사람한테 부장을 맡긴거야. 그래서 홧김에 겨울방학때 듀오에 가입했는데, 딱 자기 같은 사람이 나왔다지 뭐야. 그래서 3개월만에 결혼하고 지금 잘 살아.’ 아주머니…해외 체류 부러우세요? 40살이 되어도, 파트너가 있어도 나는 이런 훈수를 들어야 한다는 게 분하고 어지러웠다. 그 혼란의 대화 틈바구니 속에서 적당한 응수의 칼을 꽂지 못했던 것도. 


문제는 나도 J의 인정을 원한다는 것이다. 내 행정 업무 중 가장 큰 부분이 국제교류인데, 부끄럽지만 해외학교와 영상회의를 할 때 내가 긴장해서 말 실수를 할까봐 J에게 회의를 주재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있다. J는 쿨하고 칠한 어메리칸 답게 돌발상황에도 유연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두번째 회의 요청이 들어와서 두번째에는 내가 회의를 주재하고 J가 옆에서 돕는 형식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를 마치고 예의 4명의 식사자리에서 갑자기 J가 나를 추켜세웠다. ‘M이 얼마나 유연하고 능숙한 바이링구얼에, 중재자인지 정말 놀랐어. 마법같았어.’ 미국식 호들갑인지 알면서도 마음이 으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 오후 내내 신나는 마음으로 수업하는 나를 발견했다. 캐시 박 홍이 ‘마이너 필링스’에서 썼던 “백인의 환심을 사도록 교육받았으며, 환심을 사려는 이 욕망이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음”을 내가 깨닫는 순간이었다. 


벨 훅스는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에서 계급을 인종, 성별, 자본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 것으로 설명하였다. 우리 학교 영어과에도 이 복잡한 계급도는 미묘하고도 또 굳건히 서있다. 우리 학교 영어과 계급도에 벨 훅스가 언급하지 않은 요소는 아마도 영어 사용 능력 정도 이겠다. 나는 인종도 성별도 영어 유창성도 실패했는데, 내 마지막 계급 상승 기회는 헤테로 결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동성 애인과 결혼한다고 하면 내 계급은 상승할까 하락할까? 지금까지 내 파트너와 동거생활과 커밍아웃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리 밝은 전망은 아닐 듯하다.   

이전 03화 교직에도 희망이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