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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ul 24. 2023

젊은 여교사가 학교에서 겪는 일(1부)

서이초 선생님 사건에 부쳐



서이초 선생님 사건 때문에 몇 일째 트위터에서 살고 있다. 이 사건에 교사들이 학교급에 상관없이 모두 동요하는 것은, 그것이 그 선생님 개인만이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라는 곳이 정말 쉴 새없이 변하는 곳이지만, 학교라는 공간만큼 그럴까? 학교라는 공간은 내가 재직했던 약 20년간 숨가쁘게 변했다. 유감스럽지만 더욱 열악하게 변했다. 적어도 20년 전에는 악성 민원이라는 이슈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교육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행정 업무가 하나 둘씩 늘어갔고 이제는 업무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교사의 가장 큰 노동 영역은 수업이 아니라 행정 업무이다.)  돌봄 노동의 무게는 점점 늘어가지만 보상은 적다. 교사가 해야하는 영역은 그야말로 무한대같이 느껴진다. 참고로 내가 7월 13일 하루에 했던 일의 종류를 일기에 적어 내려갔는데 무려 20가지였다. 나는 수업과 성적이 더 강조되는 특목고에 재직하고 있는데도 이 지경이다. 책임은 너무 많은데 권리는 적다. 특히 학생이나 학부모로 부터 교권 침해 사건을 겪으면 교사의 권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보호해줄 권리나 법률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학교라는 조직의 수장인 교장과 교감이 철저하게 남의 편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동료 교사들도 모두는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놀랄 것이며 두번째는 화가 날것이고 세번째는 외로움에 치를 떨 것이며 네번째는 우울함에 말라갈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교사들이 가장 동요한 지점이 고인이 자살을 선택한 공간이다. 그는 한 학기 동안 창문이 없는 교실에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수업과 식사와 업무를 모두 한 교실에서 해야하는 초등학교 업무 특성상 무척 힘들었을 것이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초임이고 2년차 신규 교사이다. 아마 교실에 대해 저항을 했을 테지만 의견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희망해서' 1학년 담임이고 '희망해서' 나이스 업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교사들은 학년 말에 업무 분장 '희망서'라는 것을 쓴다. 19년차인 나도 희망서를 쓰면서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을 안다. '희망'서는 말만 희망이지 '강요'서가 된다. 희망서에 내 희망대로 적으면 그 날 오후에 교감이든 부장이든 전화가 와서 회유와 압박을 한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희망서를 고쳐쓴다. 19년차인 나도 이렇게 하는데 2년차는 어땠을까? 2023년도 리뉴얼된 나이스는 막말로 개판 그 자체였다. 그 대 혼란의 아수라장에서 수업과, 돌봄 업무를 하면서 동시에 나이스 민원 처리를 (놀랍게도 나이스라는 온라인 행정 시스템의 불만 민원 수리를 학교 내 한 명의 교사가 한다.) 했을 것이다. 그리고 4명의 학생의 학부모에게 악성 민원에 시달리게 된다. 밤낮없이 전화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죽을 공간을 교실 내 창고로 선택했다. (그 와중에 아이들을 생각해서 교실을 선택하지 않았다.) 고인은 유서를 쓰지 않았지만, 우리 교사들은 이것이 어떤 메세지를 전하는 지 안다. '여기서 죽으면 이 사람들이 내 억울함을 알아줄까?' 나도 정확히 9년 전 그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들은 대게 사범대나 교대를 가기를 권장받는다. 꼭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처럼 부모도 학교 교사도 모두 그렇게 군다. 19세 뭣도 모르는 고3 여학생은 그렇게 사범대와 교대를 간다. 그리고 착실하게 공부해서 23살이 되면 임용에 합격한다. 그 뒤는? 남들이 말하는 방학(긴 휴가)을 갖고 신붓감 1위라서 콧대높여서 상향혼 하고 철밥통에, 노후에는 높은 연금 받고 편하게 살아갈까? 



나도 순진하게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23살만 되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것이라고. 세상이 다 나를 존중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꽤 달랐다. 나는 도시의 가장 열악한 지역의 남자 중학교에 발령이 났다. 그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 중 굵직한 것만 읊으면, 어린데 고분고분하지 않다고 왕따시키던 동료들과 선배교사들(20대 '언니'들은 내게 눈치주고, 50대 여교사는 나를 방송실에 불러서 '지도'했다.), 1학기 끝나고 여름방학식에 주로 하던 1박 2일 교직원 연수(사내 MT라고 생각하면 됨)에서 부르스 추자고 하던 50대 남교사와 부추기던 50대 여교사, 치마 속을 촬영하던 담임학급반 학생들과 치마를 입지 말라고 내게 훈계하던 학생주임 남교사 들이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나는 원래 꿈이었던 1세계 이민을 위해 더욱 박차를 가했다. 무려 20년전에 탈조를 꿈꿨던 나는 단 하나의 동아줄이었던 유학을 위해 돈을 아끼고 공부해서 마침 영국에 석사유학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인 영어 교사가 영어교육학으로 영미권에서 유학한다? 원어민들로만 해도 차고 넘치는 글로벌 영어교육계 레드오션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영국에 가서 깨달았고 나는 드디어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단 하나 믿을 구석(환상)이었던 해외 유학의 꿈이 그렇게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져버렸다.




(1부 끝.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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