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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ul 24. 2023

젊은 여교사가 학교에서 겪는 일(2부)

서이초 선생님 사건에 부쳐

사건이 있기 전, 나는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멋있어서 수업을 열심히 하려고 애를 쓰는 교사였지 담임 학급 경영에는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유학에서 돌아와 멘탈 붕괴가 온 상태에서 첫 해에 담임을 맡고 1학기 만에 우울증이 왔다. 그 당시 나는 또 도시의 다른 지역의 남자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학급 반 3명이 학교의 유명한 문제아들이었다. 그 애들에게 매달리다가 본격적인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1명은 부모가 방임하고 가출하는 아이였고 1명은 ADHD를 가진 폭력적인 아이였으며, 1명은 폭식증에 등교 거부하는 아이였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교통사고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빨리 상담 치료를 받으러 갔고, 6개월 만에 나는 다시 정상 레벨로 돌아왔다.



그 다음해 2014년 3월은 교사생활 중 가장 행복한 달이었다. 우울증을 내 힘으로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처음 만난 학급 아이들은 너무 예뻤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매일 아침 학교에 가고 싶었고 수업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때 W를 만났다. 



우리 반 학생이던 W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학생이었는데 겉으로 봐선 티가 잘 나지 않았다. 글은 왼손으로 썼고 빗자루질을 할 때는 양손으로 했다. 그때 나는 학생들과 학급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W의 일기는 항상 부정적이었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것이 신호였는지는 몰랐다. 손에 장애가 있긴 했지만 거의 모든 일을 척척 해냈고 심지어 공부도 잘했다. 집안 환경도 꽤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봄 날, 녀석은 학생 부장에게 혼이 났다. 학생부장은 기준이 늘 들쑥 날쑥 했는데, 그 날따라 아이에게 엄한 기준을 들이댔다. 학부모 총회가 있는 날이어서 W의 어머니가 총회에 온 김에 아이에게 음료수를 주었고 운동장에서 그것을 마시고 있던 W는 외부 음식을 먹는 다는 이유로 벌점을 받았다. 아이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는지 부장에게 '시발' 이라고 하고 달아났다. 학생 부장은 나의 내선번호로 전화를 걸어 자기는 하기 싫었는지 내게 그 학생을 지도 할 것을 '지도'했다. 그 날 그 아이 차례였던 학급 일기에 엄청난 욕들이 적혀 있었다. 그 아이는 내심 내가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 아이를 불러 반성문을 쓰게 했다. ‘너 아무리 화났지만 학생부장 선생님한테 욕을 해도 되겠니?’라고 지도하고 방과후에 남겨서 반성문을 쓰게 했더니, 도망가 버렸다. 


아이는 그 후 익명으로 장난 문자와 전화를 했다. 좀 특이한 것이 또래 남자 아이들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나는 그 때 이미 남자중학교 6년차 였다.)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시켜서 내게 전화를 해 종교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변조한 목소리로 ‘교회 가세요? 교회 안 가면 지옥 갑니다.’ 하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전화가 온다던가, 스팸 문자를 계속 보내는 식이었다. 그래도 ‘애들이 장난치나 보다’ 하고 넘겼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W인지 몰랐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아이는 내가 쓰는 교실에 몰래 들어와 내 책상에 올려진 보온병에 오줌을 쌌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가 되어 수업을 하다가 별 생각 없이 커피를 들이키다가 그것이 오줌임을 깨달았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이들 앞에서 침착한 척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 알릴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무능한 교사라서 내 잘못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우울증에서 어떻게 탈출했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혼자 일을 처리할 수 있을거 라고 생각했다. 내가 혼자 전전긍긍하며 모른 척 하던 그 일주일 동안 W는 반응을 더 보고 싶었는지 일주일 똑같은 일을 한번 더 했고 나는 또 그것을 마셨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것을 학교에 신고했다. 교감에게 보온병을 들고가 맡아 보라고 했다. 모두 냄새를 맡고 오줌임을 확인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 즈음이었다.


학교는 그 이후 아무 조치가 없었다. 나는 화가 나고 불안했다. 교감과 교장에게 불안해서 더 이상 그 학생과 같은 수업을 못하겠다고 호소했다. 처음에 내가 요구 한 것은 한 가지 였다. 담임과 수업하는 반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다. 교감이 나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교감이 자신이 나설 것이라고 기다려달라고 설득시켰다. 그는 곧 교장으로 승진할 사람이었고 승진에 악영향을 주는 짓을 조금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5월 말이 되자 나는 이성을 놓아버렸다. 나는 학교 메신저에 내가 당한 일을 상세히 고발하고, 학교에 설문지를 뿌렸다. (이것도 겨우 내가 설득해서 한 일이다.) 또 아무도 나서지 않아 내가 학생을 1대 1로 심문했다. (이 일은 너무 트라우마로 남아서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기억나는 메세지는 '선생님이 절 어떻게 하실 수 있는데요?'라고 비아냥 들은 것 뿐이었다.) 한 선배 여교사가 고맙게도 '긴급'여교사회 를 열어 여교사들이 한 교실에 모였다. 하지만 그 일은 결국 상처로만 남았다. 나는 당시 전교조 회원이었는데 전교조 분회장은 학생 편을 들었다. 결국 어린아이니까 내가 용서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교사회를 연 선배여교사에게 간곡하게 교장실에 같이 들어가 항의해준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 선생님은 거절했다. (그럴 거면 왜 여교사회를 열었나?) 결국 나는 학생을 경찰에 신고하고, 전교조에 도움을 요청하고, 교육청에 학생을 고발했고, 국가인권위에 신고했고, 여성의 전화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역경찰청 청소년과에 이 사건을 신고하면서 국과수에 학생의 DNA와 일치하는 지 알아봐 줄 것을 요구했다. 경찰은 기술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 학생의 부모가 허락을 할 시에만, 그 아이의 오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그 아이가 아직 법적으로 수사를 받을 수 있는 나이(만 16세)가 되지 않아서 라고 했다. 당연히 부모는 아이의 오줌을 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역 언론사에 이 사건을 알리겠다는 나를 교장이 회유하여, 그 아이는 처벌을 받지 않고 결국 내가 휴직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휴직 중 우울과 불안의 쓰나미를 겪었다. 온갖 것들이 무섭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던 부모와의 관계가 더 버거워져 겁없이 독립해 버렸다. 원룸에 혼자 일 없이 누워서 망망대해에 표류했다.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혼자 식당에서 밥 먹기가 무서웠다. 소규모 그룹에서 이야기 하는 것도 쓰러질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어떨 때는 숨이 막혀서 짧은 글을 낭독하는 것조차 되지 않았다. 그 전년도부터 하던 심리상담을 그만뒀다. 이렇게 까지 나빠지도록 나를 구해주지 못한 상담사를 원망했다. 그리고 사이비 명상센터에 들어갔다. 꼭 나쁜 곳만은 아니었다. 돈을 바쳤고 의지할 곳과 위안을 얻었다. 그러면서 W를 억지로 지웠다. 그리고 겁도 없이 그 다음해에 다시 담임을 맡았다. 억지로 웃으면서 아이들을 만났다.


그렇게 지웠다고 생각한 W는 매해 담임을 맡는 3월 2일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교실 뒷 자리에 앉아서 나를 지긋이 쳐다본다. 9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망령처럼 교실에 나타난다. 나는 그 이후 학생이 두려워졌고 특히 담임 학급 학생이 무섭다. 담임반 수업을 하면 식은땀이 나고 화장실로 뛰어가고 싶다. 담임반 아이들은 친근하게 다가와 얘기하는 것도 견디기 힘들다.  어떤 스님이 말하는 것처럼 W를 용서하면 지울 수 있을까? 그 답답한 이야기를 알리려고 수십 번 글을 고쳐 쓰는 것이 W를 지울 수 있는 길일까? 아직 나는 W를 만나지 않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4년도에 실종되어 버린 나를 이해하고 말을 걸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


서이초 선생님이 간 길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안다. 그 분이 살아계셨다 해도 그의 영혼은 오랫동안 죽어있었을 것이다. 이 일은 9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외롭고 슬프다. 우리 교직 노동환경은 안타깝게도 더 열악해지고, 
교사들은 엄연한 노동자인데도,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는 이중잣대에 놓인다. 수당을 올려달라고 하면 교사인데, 속물같다는 소리를 듣고, 일이 과중하다고 하면, 철밥통이니, 방학이니, 연금을 받으니 조용히 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연금은 벌써 박살이 났고, 방학에 강제 보충수업, 연수 때문에 편하게 쉰 적도 없다. 그리고 젊은 여교사들에게 유독 날아드는 감정 노동, 악성 민원, 성폭력, 수업 방해는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 고인의 영혼이 평화로워졌길 빈다. 그리고 우리 교사들도, 특히 여교사들도 당연한 권리를 돌려받기를 간절히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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