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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Jul 15. 2023

내가 남자를 끊은 이유

BGM: Say you love me (by KISS OST) https://www.youtube.com/watch?v=bJcaDdGBiq8




나는 양성애자이지만 오랫동안 많은 남자를 만나왔다. 짧게 데이트 한 사람도 많았고 또 섹스만 한 관계도 꽤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남자를 못 잃던 내가 어떻게 남자를 끊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런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 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어느 날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뚝 끊어진 다리처럼 이성애를 관두게 되었다.

 

내가 진지하게 처음 남자와 연애를 한 것은 대학교 3학년때이다. 고3때 영국 밴드 자미로콰이 팬클럽에서 만났던 의대생이 4년째 여자친구가 있으면서 밤마다 전화하고는 나를 세컨드 취급하는 것이 열 받아서 홧김에 그의 후배 C와 사귀기로 했다. C는 남성적 매력이 많이 부족한 모범생이었는데, 나름 피아노를 연습해서 쳐주고(https://youtu.be/jrcP_FslOB8), 나에게 목을 맸는데 나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에 빙의되어 있어서 쿨하게 ‘난 오빠를 한번도 남자로 좋아해 본 적 없어’ 라고 3개월째 되는 날 비수를 꽂고 헤어졌다. 그 비수는 훗날 다시 나를 꽂게 된다. 

 

착하고 순한 남자들은 나의 화끈함을 좋아했지만 나는 착하고 순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주로 꽂힌 남자들은 나를 함부로 다루는 소위 나쁜 남자, 나르시스트들이었다. 내 첫 섹스 파트너는 부산 비엔날레 애프터 파티 장소였던 모 댄스 클럽에서 만난 사진/행위 예술가였다. (구글에 의하면 그는 최근까지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그와의  섹스는 최악이었다. 나는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도 그의 성기가 비정상적으로 작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섹스가 끝나고 그가 한 말은, ‘네가 너무 아파해서 내가 사정을 못했잖아.’ 였다. 위에서 말했 듯 사만다에 빙의한 나는 첫 섹스를 아무나와 하고 그를 떠나는 이상한 환상에 빠져 있어서 그와 자고 난 뒤 ‘안녕’ 이라는 쪽지만 남기고 (ㅋㅋㅋ) 모텔방을 나왔다. 병신과 병신의 만남이랄까. 그 뒤로도 쿨하게 헤어지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연락과 만남을 하다가 구질구질하게 헤어졌다. 

 

그 뒤에도 그런 식으로 짧고 가벼운 만남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계속 하였다. 착하고 순한 남자들은 내게 상처받아 떠나고, 나는 나르시스트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반복했다. 그 중에 최악은 위에 말한 첫 번째 남자친구 C였다. 중간에 같이 알던 의대생 언니가 아직도 C가 나를 못 잊었다는 말을 하길래 호기심으로 다시 연락했다. 그땐 우리 둘 다 20대 후반이었고 나는 사회초년생, 그는 레지던트였다. 서면에서 다시 만난 날, 한눈에 봐도 그가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과 행동. 사회적 지위가 시소를 탄 것처럼 변한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오히려 매력을 느낀 모양이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억지로 모텔에 끌려간 것이 기억나고, 어지러운 모양의 벽지와 눅눅한 냄새가 기억난다. 정신이 나갔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내 밑이 축축했다. ‘혹시 사정했어?’라고 물어보니, 답이 없었다. 그는 아침에 나가서 약국에서 사후피임약을 사주었다. 그게 그 사람과 끝이었다. 

 

그렇게 병신 같은 연애를 반복하다, 처음 인간다운 관계를 맺은 것은 영국인 남자친구 R이었다. R역시 틴더에서 만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과 나는 3개월동안 섹스를 하지 않고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약간 모자란 듯이 보이는 R은 앞에 말한 착하고 순한 카테고리의 사람이었지만 야심도 없고 계획도 없었다. 1년간 반동거 생활을 하였는데, 문제는 나는 30대 초반이어서 결혼을 꽂혀있었으나 이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이 사람에게 비수를 꽂고 헤어졌다. 바람을 피고 환승연애 했다. 그런데 그도 내게 비수를 꽂았다. 이 놈은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hpv(인유두종) 바이러스를 내게 주었다. 

 

결혼에 미쳐있던 시기가 있었다. R이후 거의 백명이 넘는 한국남자를 여러가지 채널을 통해 만났다. 앱과 중매인들을 통해 주말마다 선을 봤다. 정말로 많은 한국남자들을 만났다. 그때 즘엔 내가 페미니즘에 서서히 물들고 있을 때였는데 내가 혹은 상대가 ‘페미니즘 사상검열’을 해서 서로를 탈락시켰다. 내가 심상정을 지지한다고 하니 나보고 페미니스트냐고 묻던 고등학교 과학교사, 아버지도 한남충이라고 부를거냐고 질책 하던 파리에서 철학 석사받은 남자(직업은 주식투자), 대학교 게시판에 ‘남자만 군대가야 하나요?’라고 올렸다가 페미 여학우들에게 인민재판 받았다는 서울대 나온 남자가 기억에 남는다.  

 

이때 즘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되어 차라리 영어권 국가 남자를 만나서 이민을 가는 상상을 했다. 틴더에서 만난 마지막 외국인이었던 영국인 P는 삼류 예술가였는데, 결국 또 다른 번호의 hpv를 내게 남기고 나를 떠났다. 

 

한국남자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동기가 소개시켜 준 경찰이었다. 그는 아주 야심가여서 승진의 승진을 거듭하여 삼십대 후반에 경찰서장의 오른팔 급의 서열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 포부와 계획을 줄줄 읊었었는데, 문제는 나를 너무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나 답장이 늦다고 끊임없이 타박을 했다. 또한,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밝히고 성매매하는 사람을 제일 혐오한다고 밝혔는데, 술에 취해서 깜빡했는지 경찰서장과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른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지적하자 황급히 아닌 척하던 것이 기억난다. 지역 경찰청에서 성인지 감수성 강의를 하던 그 사람과 3개월 만나고 헤어졌다. 

 

마지막 한국 남자를 끝으로 나는 심리 상담을 받기로 했다. 20대와 30대에 걸쳐 제대로 된 남자와 연애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은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내게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 년간 심리상담과 관계 디톡스를 하면서 내가 관계(혹은 아마도 섹스) 중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취 폭력, 외도를 일삼고, 경제적으로 엄마를 쥐고 흔들며 노예처럼 부렸고, 다른 여자를 성추행하기도 했던 아빠를 보면서 나는 남자라는 종을 같은 인간으로 여기기가 힘들었다. 여성들에게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지만, 남성에게는 이질감과 위화감, 불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빠를 부정하면서도 아빠 같은 나르시스트를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고 빠져들었다. 이런 상태의 나를 남성 나르시스트들은 귀신같이 찾아냈고 우리는 자석같이 붙었다. 주로 위험한 섹스를 했고 그 피해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하나같이 책임없이 떠났다.

 

나는 유년기부터 동성에게 끌렸었고 완전하지 않지만 연애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이성애를 관둔 시기에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동성에게 찾았고 성공했다. 현재 이성애를 관두었지만, 이성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유년기부터 보고 자란 비뚤어진 성관념과 억압적인 가부장제는 내 인생 전반에 반복적으로 문제로 나타났고, 이성애에서 희망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동성파트너를 만나서 비로소 훨씬 신뢰하기 편하고 안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 나이 37살의 일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의 여성 이성애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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