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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수 Aug 27. 2023

일상의 성폭력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원래 다니던 헬스장이 이 폭염에 에어컨을 틀지 않아서, 한달간 임시로 아파트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하기로 했다. 내가 하던 삼두운동(케이블 풀오버)을 유심히 지켜보던 백발의 고인물 할아버지(이하 할배라고 부르겠다.)가 나에게 운동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직업상 특성때문에 이 할배가 가르치는 것을 학생처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할배가 신이 나서 스트레칭을 시켜준다고 하면서 나를 눕혀 놓고 이곳 저곳 내 몸을 만진다. 운동을 배울 때 이 부분이 애매하다. 나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입장에서 내가 가르치는 것(영어)을 실제로 만질 수 있으면 나도 학생들과 같이 만지면서 가르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그것이 몸이라면? 

 

이 할배가 자기 딸이 내 연배라고 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딸이 비혼주의자라는데 그게 이해가 가냐고 한다. 나보고 결혼했냐고 묻길래, 애인이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빨리 결혼하라고 훈수를 둔다. 

 

오늘 헬스장에서 두번째 할배를 만났는데,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내게 하체 운동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실제로 도움이 되는 팁들이 많았다. 원래 다니던 헬스장 관장님에게 운동을 배우고 있었는데 관장님이 설렁설렁 가르쳐 주던 걸 일대일로 과외를 받으니 실로 효과는 대단했다. 6개월 동안 이두와 삼두 운동을 했지만 할배 덕분에 이두와 삼두가 정확히 어디있는지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이 할배가 나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한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나의 이두와 삼두, 또 하체 근육들을 거침없이 만지며 가르쳤다. 할배는 자기 자신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저씨’는 20년간 자신이 얼마나 헬스(웨이트 트레이닝)를 열심히 연구했는지 얘기하다가 갑자기 급발진 했다. 10년 전에는 ‘아저씨’가 가르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다가 갑자기 여자들이 성희롱이니, 성추행이니 불쾌해한다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즘되니 어디서부터 나도 성희롱이라고 느꼈다고 끼어들어야 할지 타이밍이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40년동안 내재화된 수동성이 강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사회에서 숱하게 만났었고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그냥 웃으며 넘겼었는데, 이 순간도 나는 수동적인 웃음을 짓고 있다. 내가 페미니스트인 것이 부끄러웠다. 이 할배가 10년이라고 정확히 짚은 지점이 2016년 강남역 사건인 것 같아서, 페미니스트들이 헛살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라 마음 한켠이 뿌듯해졌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싸워서 할배가 성희롱이라고 인지하게 만든 부분을 나는 또 웃으며 넘어가고 있다. 내 안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할배는 하체운동의 피날레로 ‘내 (남성임이 틀림없는) 애인’이 좋아할 케겔운동을 가르쳐주겠다며 GX실로 불렀다. 둘 밖에 없는 GX실에서 그는 내게 1단계와 2단계의 케겔운동을 가르쳐주고, 남자들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줘야 여자들이 오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자의 질과 항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설명해준다. 그 두 기관을 구분하는 막이 얇아서 똥이 나갈때도, 남성기가 드나들 때도 같이 움직인단다. 나는 이 순간에도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일화를 여자친구에게 말했더니 내가 No할 수 없었던 이유를 나 대신 설명해주었다. 그 할배가 선을 넘기 전에 어떤 선의를 보여주었고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쉽게 No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식자들의 수법은 나날이 정교해진다. 

 

No하기 전에 상대가 알아서 남의 신체와 의사를 존중하는 행동을 해주면 좋겠지만, 이런 문제에서 책임은 항상 피해자 쪽이 더 져야 한다는 점이 씁쓸하다. 아무리 신뢰가 두터워도 성희롱은 성희롱이다. 그것을 인지시켜 줘야 하는 몫도 피해자여야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착한 사람의 외피와 내피를 뚫고 No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 모두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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