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여성, 60대 남성, 30대 여성이 있다. 성별도, 나이도, 취향도, 관심사도 뭐 하나 공통점이 없는 이 세 사람은 가족이다. 이들이 어떤 문제에 원만한 합의를 보는 건 쉽지 않다. 이들의 취향과 성향이 자주 충돌하는 곳은 TV 앞이다.
아내이자 엄마인 60대 여성은 최근 동네 사람들과 젓갈 축제 축하공연에서 본 장민호 이야기를 줄곧 해대며 트로트 채널만 골라본다. 장민호가 트로트를 부르는 것보다 더 자주, 더 열성적으로 장민호 이름을 노래하듯 부른다. 누가 보면 장민호와 혈연관계이거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줄 알 것 같다. 현실은 사돈의 팔촌의 옆집도 안 되는 데 말이다.
남편이자 아빠인 60대 남성은 뉴스와 사극, 여행 다큐가 주 관심 채널이다. 밀리터리 바지와 발가락 양말을 장착하고 뉴스를 보면서 정치하는 놈들은 다 똑같다고 전투적으로 험한 말을 해댄다. 정치인들의 쌉소리는 저혈압 환자에게나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 남성은 고혈압이 있다. 본인과 상극인 혈압 올리는 소식을 굳이 찾아보다가 10번 정도는 정주행 했을 사극 ‘허준’을 튼다. 현재보다 눈에 띄게 젊은 전광열 아저씨가 침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보며 누워서 세계 탐험을 한다.
딸인 30대 여성은 반백수 독거 노처녀이고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 왔다. 트로트가 들리면 귀를 막고, 뉴스 보면서 욕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딸은 최애 예능 ‘지지고 볶는 여행’을 본다. 과거 연인이었거나 썸 관계였던 남녀가 여행을 떠난다. 여행과 연애와 인간관계가 얽혀있으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래야 안 생길 수가 없다. 이렇게 재밌는 걸 공짜로 봐도 되나 싶어서, 끓어 넘치는 도파민을 느낄 때마다, 무료로 제공받은 도파민 촉진제값으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고민을 한다.
60대 부부는 딸에게 뭘 이런 걸 보냐며 너나 결혼하라고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누구나 자신이 직접 감당할 수 없거나, 경험하기 어려운 것을 TV를 통한 간접경험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여행과 연애와 인간관계는 안빈낙도하는 독거 노처녀와는 영 친해지기가 힘든 단어이다. 30대 중반에 퇴사하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는 목표가 생기면서, 여행, 연애, 인간관계는 자연히 그녀와 분리가 됐다. 자신의 길을 ‘글 쓰는 사람’으로 정하고 나서는, 고독 속에서 몰입해야 했기에 그 틈이 더욱 벌어졌다.
그녀도 한 달 월급을 4박 5일 해외여행으로 태우고, 내 애인이 다른 여자가 깻잎장아찌를 뗄 때 잡아줘도 되는지, 다른 이성에게 새우를 까줘도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보다 젊었고, 여행과 연애와 사람에게 들이는 시간과 노력과 돈이 아깝지 않았다. 기꺼이 그리했고 그 과정이 기꺼웠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말라며 잡을 여유는 아직 없는 듯하다. 현재의 그녀에겐 ‘글 쓰는 일’, ‘글 쓰는 걸 돈 버는 일로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보인다. 생계와 일, 자아실현에 대해 고민하기에도 에너지가 빠듯한 것이다.
건축에 대해 1도 모르는 문외한이라도, 기반 공사 없이 건물을 올릴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삶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은 생계와 일이며, 그걸 갖추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쌓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가 엄마의 트로트 사랑과 아빠의 뉴스 습관을 갖고 있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하는 것처럼. 그러니 기반 공사를 탄탄히 하기로 한다. 정신을 차렷시키고 글을 쓰며, 쉴 때는 '지볶행'을 본다. 혼자 밥 먹을 때 밥 친구 삼아 틀어놓고 재탕하고, 가끔 '나는 솔로'도 본다. 언제까지? 자만추가 가능해질 때까지.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아니라, 자장면에 만두 추가를 금액을 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때까지. 글로소득으로 이 모든 게 가능해질 때까지.
브런치 구독자 천명이 되었네요 :>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모두 구독해 주시고 글 읽어주시는 구독자분들 덕분입니다! 너무 감사드려요!
잘 만난 구독자 한 분, 열 남친 안 부럽다!!(정말?ㅋ)
좋은 글로 보답할게요^ㅅ^
-놀마드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