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염증과 바이러스질환은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이 갑자기 찾아와서 또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나는 영화 '범죄도시'의 장이수가 아닌데, 마형사처럼 참 다양한 모습으로 어김없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게 했다.
눈두덩이가 간질거리고 미세하게 쑤신다 싶으면 다음 날 어김없이 다래끼가 자리를 잡았다. 눈을 많이 쓰고 피곤하면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보랏빛으로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보며, 간밤에 세균과 18대 1로 싸우다가 신나게 얻어터지고 장렬히 전사해 버린 나의 면역력을 위해 애도의 묵념을 하곤 한다. 중국 갔다던 푸바오를 거울 앞에서 만나는 게 이젠 익숙하다. 여기에 가드만 올리면 쿵푸팬더도 될 수 있다. 아비요오오!
얼마 전엔 하품을 하는데 입꼬리가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물집이 몽글몽글 올라온 입술은 건조하고 따가웠다. 바이러스로 인해 입술에 물집이 생기는 질환, 헤르페스(herpes)였다. 역시 구면이었다. 처음엔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es)라는 줄 알았다. 에르메스 가방이나 생길 일이지, 헤르페스는 뭐래. 최대한 입을 오므리며 하품하고, 음식이 입술에 닿지 않게 조심조심 식사를 했다. 나한테 이런 조신한 면이 있었구나. 그동안 나는 사오정처럼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 머슴처럼 우걱우걱 음식을 욱여넣고 있었다. 병이 나을 때까지는 선보러 나온 요조숙녀처럼 행동해야 했다. 에르메스 가방은 없어도 헤르페스는 있는 여자니까.
거기에 슬퍼도 걷고, 화나도 걷고, 답답해도 걷는 내게 신경 안정제와도 같은 산책을 끊게 만든 건, 바로 올해 생긴 족저근막염이었다. 글이 안 써질 때도 자주 걷곤 했었는데, 발을 점령한 염증은 나의 영감마저 앗아갔다.
직장인 시절에는 건강과 월급을 바꾸는 대가로 인후염과 지독한 안구건조증에 붙들려 살았다. 아프면 일할 때 몇 배로 힘들었기 때문에 자주 병원에 갔다. 진료 핑계로 잠깐 나오는 시간이, 쉴 틈 없이 바쁜 업무 중에 뚫린 달콤한 숨구멍이기도 했다. 어디가 불편해서 왔냐는 간호사의 물음에 누가 아픈 곳을 물어봐 준 게 까마득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료실에선 거북목으로 모니터를 보는 의사에게 건강을 챙기라는 소리도 들었다. 의사는 진료를 3분 만에 마쳤지만, 병원의 대기 환자 수는 전혀 줄지를 않았으니, 어쩐지 저 의사가 걱정됐다.
매년 받아 든 건강검진 결과지의 의사 소견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늘어갔다. 이상소견, 추적 관찰이란 단어가 물혹과 용종처럼 내게 들러붙는 것도 모자라, 오늘 비가 올지를 기상청보다 내 무릎이 더 잘 맞추기 시작하면서 건강염려증이 생겼다. 혼자 살고부터는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에 건강염려증이 더 악화됐다. 몸에 생긴 불편함이 내 기운과 시간을 뺏어가는 게 싫어서 병을 병적으로 미워하곤 했다.
대부분의 병은 내가 무언가를 너무 열심히 하던 시기에 찾아왔다. 나는 몸이 한계가 있다는 걸 잊은 채, 불로장생의 명약이라도 먹인 듯 할 일을 재촉했다. 몸이 파업을 선언하며 몸져눕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악덕 고용주 흉내를 냈다는 걸 알았다. 몸은 협상을 요구해 왔고, 그 조건은 바로 휴식이었다.
아플 때 병을 미워하다가 생각했다. 이번엔 뭘 너무 참았을까. 뭘 또 그렇게 무리해서 달렸던 걸까. 몸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병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내 조급증에게 멈춤과 속도 조절을 알려주었다. 나를 괴롭히고 갈 길을 막는 훼방꾼인 줄 알았는데, 내 의욕과 몸 사이에 서 있는 단호한 중재자에 가까웠다. 마형사처럼 우락부락하고 거친 모습이라서 악역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내게 휴식을 알려주러 온 마블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가끔 찾아와 나를 괴롭히더라도 장이수만큼 억울해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게 병의 의미를 알아버린 나는 예전의 나에게 작별을 고하며 외친다. 내는 더 이상 옛날의 장이수가 아이야!
수담작가님께서 제 필명으로 시를 써주셨어요!
정말 큰 선물 주셔서 저 생일인 줄 알았어요 ㅎㅎㅎ
글 한 자 한 자에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이 들어가는지를 알기에 정말 감동입니다ㅠㅠ
(감동 잔뜩 먹어서 배부르더라고요...! > <)
제 생각과 삶을 정확히 이해하시고, 따뜻하고 귀하게 재해석해주셔서 더 감사하고 소중합니다ㅠㅠ
누군가의 이름으로 시를 짓는 건 글 쓰는 능력은 물론이고 그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제 필명이 한글과 영문 혼합이라 사행시 짓기 어려우셨을 텐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뭐라고 쓰셨는지 궁금하시면
▶놀마드놀의 인스타 : https://www.instagram.com/nolmad_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