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타는 냄새 안 나냐고 에릭님이 묻는다면, 중학교 때부터 신화를 좋아한 나는 오빠를 향한 내 마음이 불타고 있다고 지글거리는 눈으로 외치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애가 둘인 유부남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를 사뿐히 보내드리고 보니, 요즘 나를 타오르게 하는 건 바로 가을이었다. 나는 가을을 타고 있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속도로 사라질 가을이 아쉬워서 반백수의 가을맞이 행복 풀코스 패키지를 실행했다.
가을하늘의 공활함은 애국가를 통해 국가적으로 예찬할 정도다. 세상이 뒤집어져 바다가 하늘이 되었나 싶게 파랗고 청량한 가을하늘, 그 아래에서 파도처럼 부서져 쏟아지는 햇빛을 샤워하듯 맞고 있으면 세상의 찬란함이 다 여기로 모여든 것만 같다. 폭탄 세일하는 가게 사장님만 미친 게 아니라, 요즘 날씨도 정말 미쳤다. 이거야말로 곱게 미쳤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떨어지는 낙엽을 타고 내리는 운치와 가을의 청량함이 묘하게 섞인 가을 공기를 한 사발 거하게 들이켜니, 알딸딸하게 기분이 참 좋다. 어허 취한다, 딸꾹. 이런 날씨엔 하루에 한 번은 꼭 밖에 나가줘야 한다. 가을맞이 행복 풀코스는 이렇게 고삐 풀린 뚜벅초가 되어 가벼운 산책으로 흥을 돋우며 시작한다.
바람에 돌돌 굴러가는 낙엽 밟기와 떨어지는 낙엽 잡기를 하다가, 이대로 집에 들어가는 건 중대한 과실이다 싶어서 코인노래방에 들어간다. 천 원에 3곡. 지갑에 갇혀있던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석방했다. 코노에선 카드 말고 꼭 꼬깃한 천 원짜리로 계산해야 제맛이다. 노래방 기계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천 원 한 장이 신나는 리듬으로 바뀐다. 3, 2, 1, 시작!
윤하의 기다리다, 다이나믹 듀오의 불면증, 버즈의 남자를 몰라
노래방 리모컨으로 학교 다닐 때 많이 불렀던 노래 3곡을 차례로 소환했다. 노래방 기계의 리듬은 추억으로 흐르듯 치환됐다. 이 정도면 흡사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다. 3곡을 부르니 몸에 열이 나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좀 신나는데? 천 원짜리 한 장을 마저 꺼내 노래방 기계의 입에 넣어줬다. 기계는 돈값을 정확히 해냈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플라워의 애정 표현, 쿨의 아로하
서비스까지 해서 4곡을 추가로 불렀더니 고음이 불가한 내 목울대가 오늘의 할 일을 다 한듯했다. 메인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가까운 마트에 들렀다. 맛동산이 유통기한 임박세일을 해서 천 원이다. 어릴 적 동네 슈퍼 앞에서 아저씨들이 막걸리 안주로 드실 땐 쳐다도 안 봤는데, 이젠 없어서 못 먹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득템한 과자를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향한다.
맛동산을 까먹으며 창밖에 그려진 밤하늘을 마주한다. 가을로 가득 찬 하늘을 보며 아무 걱정도 없이 별 좀 헤이려는데 별이 안 보인다. 관절염만큼이나 지긋지긋한 매연 때문인가 보다. 아쉬운 대로 도시의 불빛을 별 삼아서 바라본다. 예상을 빗나간 반짝임이다. 내가 원하는 마무리는 아니었지만 이곳에도 뜻밖에 빛이 존재했다. 의외의 곳에서도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반짝이는 행복이 있었다. 삶은 언제나 내 예상보다 더 선명하고 현명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있지만, 돈값과 행복이 정확히 비례하는 건 아닌듯하다. 등가교환이 되지도 않는다. 오늘의 행복 풀코스 패키지에 들어간 경비는 단돈 3천 원이었고, 나는 적어도 3천 원 이상으로 행복했으니까. 의외로 수많은 행복이, 만나기도 쉽고 생각보다 저렴하며 거저 생기기도 한다. '저 왔습니다'하고 넉살 좋게 오지 않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 지긋이 머물러있다. 행복도 나처럼 낯을 가리다 보다. 그나마 조금 더 적극적인 내가 나서서 품어야 한다. 내 거니까, 내 행복이니까.
항상 행복해지고 싶었던 나에게 가끔 물어보기로 했다.
"오늘이 행복은 총 3천 원입니다. 내일의 행복은 얼마에 모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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