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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Dec 09. 2024

집 없는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집 없는 서러움이 얼마나 잔인한 고통인지를.




# 남의 집살이, 그 고난의 역사


내가 남의 집살이를 한건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우리 집은 버스승강장이 잰걸음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데다 버스가 몇 시간에 한 대씩 오는 시골이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하는 곳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며 집에서 나와 살게 되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형편 때문에 최소한의 돈으로 얻은 거주지는 딱 그 값에 걸맞았다.

간이 칸막이로 공간만 구분해 놔서 옆칸사람 이가는 소리까지 들리던 낡은 고시원, 

천장에서 수시로 노래기가 떨어져서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던 허름한 자취방, 

7명이 일렬로 누우면 사방이 꽉 차 밤에 화장실 갈 때 친구를 넘어 다녀야 했던 7인실 기숙사, 

이게 내가 고등학교 때 살았던 집의 모습이었다. 

가진 게 없는 어린 여학생은 치르는 돈값에 따라 급이 나뉘는 게 세상이라는 걸 집을 통해 알아갔다가혹하리만큼 확실하게.



대학 때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학기마다 기숙사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을 해야 했다.

기숙사를 나가면서는 조금이라도 싼 집을 얻기 위해 학교와 거리가 있는 곳에 살았다. 

방 중간에 큰 기둥이 있어서 몇 만 원이 저렴했던 창 없는 고시원, 가정집에 딸린 저렴한 달방 등을 전전했다.

집주인이 고장 난 전등을 고쳐주지 않아서 한 달 동안 스탠드불빛에 의지해지내기도 했고, 닳고 닳은 임대인 할머니에게 알바로 모은 보증금의 일부를 떼인 적도 있었다

사람에 치이고 상황에 밀려 수시로 짐을 싸야 하는 생활은 고달프고 서러웠다. 





# 집으로 돌아오다


그러다가 고향에 직장을 얻게 되며 본가로 들어가게 됐다.

취직준비와 남의집살이로 지칠 대로 지쳐있던 터에 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으로 배를 채우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아빠는 출근하는 나를 위해 겨울아침마다 미리 차에 시동을 걸어놔 주셨다.


부모님과 산다는 건 단순히 공간을 공유하는 개념이상이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내 것을 칼같이 내줘야 해야 하는 세상에서 '가족'이라는 이유하나로 나를 허락하는 곳이 있다는 건 엄청난 든든함이다. 

이젠 집주인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수시로 짐을 쌀일도 없으며,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갖고 싶어도 참았던 물건도 살 수 있다. 돈과 계약이 아니라 천륜으로 끈끈히 엮인 부모님과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에 비로소 편히 발을 뻗고 잠이 들었다.





# 다시 새로운 곳으로


이런 내게 독립은 쉬운 게 아니었다. 

임차인의 설움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집을 살 여력은 없었기에 LH행복주택은 독립을 위한 최선의 선택지였다.

건물이 관리가 잘되고 있어서 안전하고 쾌적한 느낌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집주인이 자신의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표준화된 문서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빗거리가 적다. 좋은 임대인을 만나길 바라며 나의 대인운을 시험해보지 않아도 됐다.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옮기는 게 가능하며 혹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가슴 철렁할 일도 없다. 



그렇게 새로운 보금자리, LH행복주택으로 입주하는 날이 다가왔다.




돈주고도 못 먹는 맛있는 엄마밥! 먹을 일이 줄어서 슬펐지만, 가끔 가기 때문에 갈 때마다 진수성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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