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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마드 노을 Sep 15. 2023

무섭지만, 그래도 네가 좋은 건


어릴 때 할머니께서 사과 껍질을 끊지 않고 깎으시는 게 그렇게 대단해 보였다. 할머니를 따라 처음 사과를 깎을 때는  바깥쪽으로 껍질을 쳐내면서 칼질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칼을 쓸 수 있게 되니 내가 도울 수 있는 집안일의 범위가 넓어졌다. 그럴듯한 어른놀이의 티켓을 얻게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러나 서툰 칼질 때문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보는 일이 생겼다. 칼날이 살을 베는 느낌은 온 신경이 쭈뼛서게 날카롭고 아팠다. 연고를 바르고 상처밴드를 붙이고 나서는 저 멀리 물러나 앉았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했던 손 씻기와 머리 감기에 불편함이 생겼고, 밴드에 쌓인 손마디는 습기 때문에 하얗고 쭈굴쭈굴해졌다. 며칠 동안 밴드를 수시로 갈아 끼우며 생각했다.


칼은 참 날카롭고 아프구나, 정말 기분 나쁜 느낌이야.



사람이 자란다는 건, 칼을 쓰는 처럼 많을 것을 경험하고 배워나가는 연속이었다. 위험하지만 또 유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됐다. 내게 과일을 깎아주던 칼처럼 그들과의 대화는 즐거웠고, 칼을 다루지 못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맛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까끌거리는 껍질이 벗겨진 부드럽고 달달한 과일을 먹는 것처럼 신세계였다.


헌데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칼날에 베이듯 마음을 다치는 일이 잦아졌다. 칼은 내 맘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 손가락을 베었고 붉은 피가 났다. 무섭고 아파서 반사적으로 물러나 앉았다.


호들갑 떨면서 울기가 창피해서 별거 아닌 척, 괜찮은 척했으나 칼을 만지는 게 무서웠다. 서랍 깊은 곳에 칼을 넣어두고 모른척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처럼 날카로운 아픔이 떠올랐다. 매번 다치고 베여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픔이었다. 좀 거친 걸 감수하더라도 껍질째로 과일을 먹었고, 껍질을 깔 필요가 없는 것만 찾아다녔다. 칼 없이 사는 건 까끌거리는 과일껍질을 씹듯이 거칠고 불편했지만, 칼에 베이는 게 더 싫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픈 게 싫었고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였다. 너무 외로웠지만 사람에게 베이는게 더 싫었기에 조금이라도 덜 싫을걸 고를 수밖에 없었다. 베인 손가락이 아물지 않아서 칼을 쥘 수가 없었고, 그 아픔을 기억하는 마음 때문에 칼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친 마음을 돌보며 지낸 시간 덕분에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다. 그리고 아픈 마음을 상처밴드처럼 품어준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칼을 만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사람에게 베인 상처를 보듬어 준건 다름 아닌 또 다른 사람이었다. 아픔을 공감해 주고, 힘들 때 도와주는 들이 있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조금씩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칼은 날카롭고 위험했지만, 잘 사용하기만 하면 색다른 즐거움을 가져다줬다.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게 했고 그로 인해 다채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양해졌고, 관점이 달라졌고, 세계가 넓어졌다.


칼로인해 가끔 베이고 아팠지만 그래도 조금씩 용기 내어 칼자루를 잘 쥐어보려 한다.

내 인생의 만찬이 다채롭도록, 그리고 그 만찬을 함께 즐길 그들의 삶 또한 맛깔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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