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단기 임보로 시작해서 작은 사건을 몇 차례 겪으면서 어느새 봄이 왔다. 은비를 쉼터로 다시 돌려보내도 합당한(?) 시간이 되었지만, 처음 임보를 시작할 때부터 좋은 가족 찾아주기가 목적이었기에 누군가의 가정집이 아닌 곳으로 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최대한 훌륭한 강아지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다. (사실 은비는 이미 우리 집에 도착할 때부터 훌륭한 선비 강아지였고 오히려 은비가 나를 성장시킨 듯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정이 자꾸 쌓이게 되었고, 행동사 카페와 은비 인스타그램 계정에 입양 홍보를 해야 하는 게 임보 조건이었는데 혹시나 너무 정성스레 쓰면 우리 완벽한 은비를 누가 바로 데려가버리겠다고 할까 봐 두려워서 어느 순간부터 포스팅을 상당히 소극적으로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평소에 강아지의 습성에 대해 알수록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많이 타는 개의 성격상 강아지를 데리고 출퇴근 가능한 회사를 다니거나 부자 백수의 꿈을 이루기 전에는 개의 행복을 위해 종신계약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임시보호는 말 그대로 일시적으로 맡아주는 거라 몇 달 동안만 게으른 내가 조금만 부지런을 떤다면 강아지를 망가뜨리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또 궁극적으로 미래에 어엿한 견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불편함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저질렀던 일이다. 그런데 하루하루 매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고 간식을 주고 뒤치다꺼리를 하는데 생각보다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걱정 중 하나였던 저녁마다 줄지어있던 저녁 약속과 술 약속은 서글프지만 30대 초반이 넘어가니 적당히 줄어가고 있었고, 그마저 남은 약속도 집으로 사람을 부르거나 저녁에 산책을 시켜주고 다시 나가거나 그럴 시간이 안되면 밤에 와서 5분 10분이라도 산책하고 자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물론 평소보다 오래된 기다림에 지친 은비가 아주 가끔 배변패드가 아닌 푹신푹신한 곳에 시원하게 소변을 봐 두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희생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다. 부모님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지인들은 모두 잘 아는 사실이지만... 학교생활,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 관계에서까지 최대한 폐 끼치지 않으려 하고 그만큼 상대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베풀지 않는다. 성격으로 보면 고양이에 가까운 나는 처음에 항상 쓰다듬어달라고 팔을 휘적대고 내가 가는 데마다 쫓아오는 은비가 부담스러웠지만, 이내 그 사랑스러움에 무릎 꿇고 말았다. 다른 훌륭한 보호자처럼 마당이 있는 집에 살거나 매일 산책을 두세 시간 하거나 끼니를 정성스레 생식으로 대접하는 일은 못하지만, 아침저녁으로 20분 내외로 산책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며칠에 한번 빗질을 하고 그리 나쁘지 않은 사료와 간식을 준비해주는 일은 할만 했다. 무엇보다 은비가 오고 나서 스스로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더 오래 걷고, 주말이 점심이 지나 일어나 누워서 TV 보다 지나는 게 아니고 남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니 누가 보기에도 건강해졌다. 불쌍한 집 없는 유기견을 돌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은비도 나를 키우고 있었다. 또 생각하면 슬픈 일이지만 은비의 빨리 흘러가는 시간을 생각했을 때 늦어도 40대 후반에는 떠날 텐데, 적어도 그때까지는 월급쟁이로는 살아갈 테니 은비 밥값이나 병원비 마련에 큰 걸림돌이 없을 듯했다. 만약 언젠가 키워야 한다면, 지금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큰일을 결정할 때는 핑계가 필요하다. 마침 5월 내 생일이 다가왔고, 이사를 해야 했다. 은비랑 같이 살 수 있는 조금 더 큰집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 집은 사람 하나 살기에도 좁았다.) 만약을 대비해 행동사에 입양 선언을 하는 것은 이사 이후에 하는 것으로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고, 혹여나 그 사이에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의 가정에서 입양 신청이 들어온다면 슬프지만 기쁜 마음으로 보내줄 작정이었다. 입양 홍보가 부족했던 탓인지 입양 문의 건은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반려동물을 키우게 해주는 전셋집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이전 집을 빼줘야 하는 날짜 3주 전에 알맞은 집이 나타났고 바로 계약을 했다. 3주 뒤에 이사를 마치고 짐 정리를 대충 하고 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행동사에 입양 전환 연락을 했다. 당시 이미 6개월 정도 임보 중이었어서 바로 인정받을 줄 알았는데 약간의 확인 절차가 있었고 (파양 하는 몰지각한 인간들이 워낙에 많아 당연한 절차라 이해했다.) 나이는 서른이 넘었지만 부모님 확인 전화를 마치고 나서야 은비의 공식적인 임종까지 보호자로 명 받을 수 있었다.
혼자 살면서 강아지와 함께하는 나를 보며 주변에 과거의 나와 비슷한, 강아지를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참 좋아보이고 부러운데 자기는 아직 본인도 보살피기 어려운 상태라 반려동물을 키우는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나 또한 내 자신은 도저히 챙길수가 없어서 더 늦기전에 작은 동물 친구라도 챙기는거라 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곤 한다.
사람을 사람 만드는건 훌륭한 분들이 하는 일이다. 난 대신 개를 개답게 만들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