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흔든 언어의 상처
뉴질랜드에서의 나의 학창 시절은 분명 빛나고 자유로웠다. 광활한 자연과 창의적인 수업은 내게 끝없는 영감을 주었고 미술이라는 학문에 깊이 매료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회화뿐 아니라 디자인, 사진 등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며 미술이라는 큰 바다 안에서 헤엄치는 듯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빛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그림자와도 마주하게 되었다.
미대 입시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던 나는 우연히 한국인 미술 선생님의 제안으로 그분의 집에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배우며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었던 순수한 열망이 내 발걸음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사람은 보이는 모습만으로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뼈저리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한국인 집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다소 낯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의 본색이 드러났다. 해외로 이주한 이민자들에게 낯선 땅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지위와는 무관하게 이곳에서는 그저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과 좌절을 감추기 위해 유학생들에게 언어의 칼날을 들이대는 모습은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분은 종종 유학생들을 향해 "쓰레기 같은 존재",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이들"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았다. 한국에서 부모의 눈을 벗이나 방탕하게 산다는 둥, 한국 사람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둥,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언어폭력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나는 그렇지 않으니 상관없다'라고 애써 무시했지만, 반복되는 말 앞에 나의 자존감은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 지내는 동안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인 듯한 착각에 휩싸이며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더욱 힘들었던 건 내가 사랑하던 봉사활동마저 부정당한 일이었다. 주말이면 한인성당에서 자폐아동을 가르치며 작은 보람을 느끼곤 했는데 선생님은 그마저도 막아섰다. "네가 뭔데 아이들을 가르치냐", "대학에 가기 싫으냐"는 폭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잃어갔다. 몇 년간 이어온 일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자 나는 존재의 의미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듯한 상실감에 빠졌다.
방학 동안 잠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냉장고 문을 열며 "엄마, 열어도 돼요?"하고 허락을 구하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나는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있었고 그 모습은 부모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처음에는 내 꿈을 지켜주고 싶어 조금만 더 버텨보라고 하셨지만 결국 건강이 무너지고 매일 쓰러지는 내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은 구원의 손길이자 동시에 패배의 선고처럼 들렸다. 결국 나는 상처투성이로 한국에 돌아왔고 실패자라는 낙인을 스스로에게 찍은 채 살아야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미대생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과연 쓸모 있는 사람일까?" 수많은 질문이 나를 괴롭혔고 바닥에 닿은 자존감은 더 이상 몸을 일으킬 힘조차 주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듯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내 곁은 지켜본 엄마가 말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기분 전환 좀 하자. 머리라도 하러 갈래?"
그 작은 손길이 나를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내 인생의 두 번째 터닝포인트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