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 장윤석 Sep 27. 2020

별님께

별님께


별님, 아무래도 어제 나눈 말들이 계속 맴돌아서요. 몇 자 남겨 봅니다.      


기후. 기후위기. 역사상 없었던 미증유의 위기. 인류 혹은 문명의 기반이 되었던 자연적 조건이 (생물 종의 기준에서) 붕괴한다는 과학적 합의. 자본주의와 일러왔던 19세기 이후 서구 근대문명의 작동방식이 그 순리 상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결과. 오래전부터 예견되고 비판이 터져 나왔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미동 않다가 이제 와서야 슬슬 감이 오는 지경. 정치체제의 무책임성, 식민지 시대부터 거슬러오는 역사적인 책임들, 이중 운동으로서 반동 혹은 극우 혹은 회의주의자들의 득세, 경제와 생태는 분리되었다는 강한 고정관념, 기득권 혹은 자본가 계급, 군산복합체, 초국적 기업의 구 화석연료 레짐 지키기.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원인들과 (이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들이 맞물려 초유의 사실 앞에 직면해있지요.            


1.5도를 정말 믿고 있나요? 하고 물었지요. (다른 의미로) 저는 믿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미 문턱 값에 진입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과학자들의 말, 그리고 지금 변화의 속도를 셈에 더할 때 정말 늦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고요. 곧 IPCC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1.5도가 안일한 제안이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확인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는 기록을 남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확립해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확립해두고, 흔들려서는 안 되는 원칙들을 분명히 하고, 비가시화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나 추잡하게 이 체제가 움직여 왔는지를 고발하 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기후정의는 그 면에서 조금 다른 낱말일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남은 탄소 예산을 말하는 것과, 곧 기후난민이 물 밀리듯이 흘러 여기로 올 때 이 나라의 가해를 분명히 드러내고, 책임을 분명히 해 “받아야 한다”라고 못 박는 것은 그 면에서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같이 말할 겁니다) 설령 마지막 배 한 척이 침몰하더라도, 잃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기록하고 확립해두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게 제가 아시아를, 생태 학살을, 기후정의를 연구하는 까닭입니다.         


어제 별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일리치의 CIDOC(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설명하는 글을 옮기면, “일리치는 1965년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 CIDOC를 설립했다. 1970년 CIDOC는 명실상부하게 ‘대안대학’, ‘자유대학’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전 세계 사상가와 활동가들의 집결지이자 급진 사상의 진원지가 되어 서구의 급진적인 진보 지식인들과 제3세계 운동가들의 의무적인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일리치는 CIDOC에서의 활발한 토론과 세미나를 바탕으로 그가 ‘팸플릿’이라 부른 작은 책자들을 출간했다.” 이곳은 정확히 설립한 지 10년 뒤에 성대한 축제 속에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주장의 초석이 되는 생태철학과 비판적 담론의 기원이 꽤 많은 부분 이곳에서 시작되기도 했지요. 저는 언젠가 내려가 이런 장(場)을 만들 생각이랍니다. 아마도 탄소 예산이 사라지는 7년 뒤, 정도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나눌 이야기들이 제가 말하는 ‘기록?’이 아닐까요.


또     


제 친구 희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같이 살다가, 희는 완주에 내려가 작은 텃밭과 스스로를 가꾸고 있어요. 서울에 있을 때 몸에 밴 흔적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치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전화를 하면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나는 중앙에서 무언가를 부수고 족쇄를 끊고 급속한 변화를 만들려 애쓰고 그러지만, 이게 다는 아니란 걸 알아. 나는 서른이 되면 내려갈 거야. 비판 후에는 대안이, 무언가를 부수고 나면 형성이 필요하니까. 모순을 드러내는 말이 있고, 그 드러낸 언어와 가치 위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야겠지. 그리고 희도 말을 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있을게. 지역에서 로컬에서 해야 할 일을 할게. 곧 보자. 그렇게 말을 나누고 나면 조금 든든합니다.      


저번에 희로부터 풍선 덩굴 씨앗이 담긴 소포가 온 적이 있습니다. 화분에 심었는데 한 달 여가 지나도 아무런 미동이 없길래 죽었다고 결론 내렸죠. 그런데 또 한 달이 지나고 못 보던 풀떼기가 있는 겁니다. 지금은 꽃이 피었습니다. 저는 내 섣부른 비관 혹은 (합리적이라 가정하는) 확고한 예측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방식과 입장, 태도가 어우러져 전환을 일구어내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투 트랙, 이라는 마법의 단어도 있고, 길항작용 혹은 앙상블, 시너지, 양의 되먹임 등 이 폭넓은 스펙트럼과 입장과 선택들이 뒤엉켜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 경제와 기후금융을 같이, 그린뉴딜과 탈성장을 같이, 급속한 에너지 전환과 지역 공동체로부터의 풀뿌리 전환을 같이 이야기할 때는 엄연한 모순이 존재합니다. 어제처럼 부딪히는 갖가지 지점들이 머리를 싸매게 합니다. 그런 거 많죠.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크게 봅시다, 혹은 길게 봅시다. 내가 보고 아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이건 저에게 늘 하는 말이에요. 어떤 작용이 일어날지, 길들이 어떻게 얽히고설키어 화합을 만들어 낼지 저는 모릅니다. 희망만이 있을 뿐. 저희가 다른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믿음이 제가 무언가를 하게 하는 힘입니다. 같은 감정 – 분노와 무력감 – 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풍설이 길었습니다. 이제 일하러 가야지요. 그래도 아직 제대로 해볼 생각을 하면 설레서 다행입니다. 요새 극악무도한 이들을 조사불(?) 생각만 하면 참 음흉하게 행복해서 괜찮습니다.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눈빛이 총명해지는 순간들을 아낍니다. 그때 살아있음을 느껴요. 별님도 아무쪼록 지속 가능한 마음이 되기를 바라요. 우리 할 수 있습니다.           



2020.9.27. 일(日)

간밤에 생각이 많아 잠을 잘 못 이룬, 하지만 총명한 분노와 열정으로 할 수 있다 맘먹은

윤석          


덧. 사적인 편지, 를 굳이 모두가 볼 수 있는 공론장에 올리는 까닭은 혹여나 같은 고민으로 지독히 괴로워하는 이가 인근에 있을까 하여. 그리고 우울과 버거움, 그 속에서의 태도와 의지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의 동력일 듯해서

작가의 이전글 AYARF Open Proposa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