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게 이야기다. 얼마 전 집으로 큰 스티로폼 박스가 배달왔다. 열어보니 큰 홍게 다섯 마리가 있었다. 홍게는 싱싱했고, 지나치게 싱싱했다. 뒤집어진 홍게는 부리나케 다리들을 움직여댔다. 저녁을 차려야하는데, 요놈들을 요리해야하는데 도무지 손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손질법을 알고는 있다. 수돗물에 잠시 담궈 두었다가 칫솔로 빡빡 문대서 솥에 넣고 찌면 된다고 알고는 있다.
갑자기 며칠 전에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스위스에서 동물보호법을 개정해 랍스터를 산 채로 삶으면 불법이란다. 조리 전에 기절시키거나 전기충격으로 고통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벌금형이다. 랍스터를 비롯한 갑각류가 고등 신경계를 가져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수용한 것.
앎은 괴로움을 유발한다. 이 기사를 읽은 내가, 갑각류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버린 내가 어찌 홍게를 산 채로 쪄버릴 수 있겠는가. 권장 ㅠ조리ㅠ법은 –2도 이하의 온도에서 한 시간여 두어 중추신경계를 마취한 뒤 칼로 신경계를 끊는 것. 홍게를 냉동실에 넣는데 그조차도 괴로워 내내 불편했다. 산 채로 끓이는 것이나 얼리는 것이나 고통의 최소화를 방향으로 하더라도 결국 무해할 수는 없겠다 싶은 괴로움. 마비되기를 기다리며 방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깜박 졸고 일어나니 이미 아버지가 산 채로 쪄버린 뒤였다.
...
그 날 저녁을 굶었다.
어떻게 생각할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아 쫌 너무 간 것 같은데?”, “오바..아닌가?”, “중증이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심하면 “미친노마”겠지. 마음이 착잡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공감을 해 주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인데도 그랬다. 하긴 그도 그럴것이 꽃게에 죄책감을 느끼는 내가 스스로도 아니다 싶으니까. 요새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프로불편러의 극한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불안과 초초함을 느낀다. 내가 뭔가 잘못된 방향을 걷고 있나 싶기도. 과하게 말하면 전공을 전향해야 하나 싶기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한동안 우울감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물음은 내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 같다. 어느 정도까지 인간에게 허락되는가 모르겠다. 채식을 두어달 하고 실패한 지금의 난 매 식사에 모순을 품는다.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살생의 총합이라도 줄이고 싶다. 그러나 이 것이 문구로만 남는 것 같아 괴롭다.
어디까지 죽여야하는가. 굉장히 애매해지는 영역이다. 대개 고통을 느끼는가의 여부를 잣대로 들이밀고 있다. 법학적으로는 고통이 하나의 판단준거가 되고 있는 듯하다. 타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비윤리적으로 보는 걸까. 그렇다면 죄책감이 중요한 키워드겠다. 그리고 본래적 인간의 죄책감을 발생시키는 것은 그 존재가 얼마나 인간과 가까운가에 대한 것 같다. 토마토를 먹으면서 죄책감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개, 고양이, 원숭이 등 고등 동물로 올라갈수록 유대를 느끼고 따라서 죄책감을 느끼니까. 그러나, ‘보신탕을 먹으면 야만인’같은 망언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애완견이 누군가의 입에서는 고기라는 것은 모순적으로만 다가온다. 이 사항에 다해“그 개랑 애완견은 달라. 얘는 식용이고 얘는 가족이야”라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잦은데, 이것이 흑인을 노예로 부릴 때 사용하던 이데올로기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피부색이라는 미묘한 차이가 계급을, 심지어는 인간이고 아니고의 구분을 낳았던 것처럼 유대라는 미묘한 차이가 살생의 여부를 구분하는가 말인가.
만약 인간과의 유대가 인간이 가지는 죄책감의 근원지라면, 나같은 경우는 굉장히 기이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 어느덧 십여년을 물고기와 새우와 함께했다. 중학교 때는 가급적이면 회를 먹지 않았다. 죄책감보다는 물고기를 기르면서 물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새우는 특히 어항에 있는 녀석과 식탁에 있는 녀석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 지금은 회를 먹는다. 저번달에도 저저번 달에도 먹었다. 영 달갑지는 않지만, 한강의 ‘채식주의자’소설처럼 게워낼 만큼은 아니다. 내 입은 꾸역꾸역 회를 집어넣고 내 위장은 맛있게 녹여낸다. 다만 굉장히 찜찜하고 찝찝할 뿐이다. 불편하고 괴로울 뿐이다. 수조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물고기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눈동자에서 무언가 잔인함을 읽는다.
물생활이라는 취미가, 물고기와 새우를 수조에 가두는 근본적인 근대적 인간의 포악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취미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나는 수조 내 복지를 실천하기로 했다. 물고기와 새우를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스트레스의 최소화를 목표로. 다 내 죄책감 덜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은 이 업계에 거의 없다. 물생활 카페에서 생명의 무게가 돈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본다. 이를테면 새 물에 값싼 물고기 몇 마리를 넣어서 그 물이 안전한지 아닌지 생체실험을 한다던가. 키우다 질리면 변기로 버린다던가. 여기서도 자본의 괴이함은 발생하는 것 같다.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위해 타자 – 즉 자연세계를 대상화하고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아이러니다. 인간 자체가 가치는 세계의 파괴성을 감안하더라도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인 지금은 망국으로 향하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래. 도축을 어떻게 하든 산천어 축제를 하든 말든 눈 딱 감더라도, 자연을 대상화 하는 방식이 지금의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몽골에 가서 놀란 것은, 채소가 고기보다 비싼 육류섭취를 주로 하는 환경에서, 민족 모두가 어지간한 채식주의자 이상으로 자연세계에 대한 윤리관이 확고했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존중. 그들은 삼년 이하의 어린 가축은 도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확고부동의 철학이었다. 어린 가축을 도축하는 자가 있다면 내쫒는다고 들었던 것 같다.
칸트의 ‘동물에게 잔인한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는 말을 좋아한다. 사회의 성숙도가 동물에 대한 사회성원의 인식과 비례한다는 이야기.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터져나오는 지금의 우리 사회가 진보의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소리 되시겠다.
사실 이 글의 발단은 한 기사와 그 기사에 대한 친구의 비판글로부터 비롯되었다. 불편함은 괴롭다. 살기 힘들게 만드는 거 맞다. 말 그대로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다. 하지만 분노는 새벽 세 시까지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을 준다는 것. 이런 끄적임이 내 삶을 구원해내길 바랄뿐.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78882.html
사실 굉장히 잘 쓴 기사라고 생각을 했다.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느라 논리적 오류나 과학적 근거의 부족을 낳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편지 형식을 띄고 있다는 게 좋았다. 감수성의 영역은 논리로만 부딪히면 필연 한계에 부딪히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더라도 감정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명에 한 명은 설득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
허나 같은 글이라도 이리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충격적이긴 하다. 더군다나 친구는 내가 모든 면에서 존경에 가까운 지지를 보내는 분이라 더욱 그렇다. 철학, 역사, 종교, 경제, 여성 등 모든 영역에서 비판적 어조로 혜안을 보이는 동지이기 때문이다.
인상깊게 본 랍스터 예시와 '집단학살'의 표현이 그에게는 거북함을 불러일으켰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감정적 접근이 '감정과잉'으로 해석되었다. 녹색당과 환경운동단체가 가지고 있는 슬픔의 의식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슬픈 부분이다. 그들의 현실인식 '폐급'이라는 것에는 그들의 현실인식에 대한 노력과 정밀성을 미약하나마나 아는 나에게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녹색녹색한 내가 가끔 현실인식을 '폐급'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 랍스터에 죄책감 느끼는 미친놈 아닌가 - 하는 생각은 든다. 괴로운 생각이다. 이대로 가다가 떨어진 과일만 먹는다는 프루테리언이 되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건 나도 좀 심하지 않나 생각을 하고 있으니) '추락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그의 말에는 녹색당과 환경운동단체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에 폐쇄적인 사고방식 - 접근방식이 한 자리를 차지하나 생각이 들어 비판을 겸허이 받아야겠다. '양심적 병역거부'처럼 환경문제가 가지는 심각성에 비해 이를 효과적으로 알리는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게다가 이 산천어 기사는 한겨레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아주 광범위하게 탈탈탈 털리는 중이니 좋게 본 건 나와 몇몇의 소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다시 돌아가 그는 기사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어류도 통증과 공포,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는 말 한마디로 랍스터와 어류의 신경학적 공통점 - 고통의 여부 - 포인트를 퉁친 것을 비판하는 모양이다.
팩트체크를 하고 넘어가기 위해 랍스터와 어류의 신경계와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의 여부를 다룬 연구와 법제화된 사례를 다루며 마친다면 이 졸린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오징어나 갑오징어같은 연체동물도 연구의 대상이다. 미국의 로빈 크록 교수는 텍사스대 환경과학센터와의 연구에서 “갑오징어와 문어도 상처를 어루만지거나 보호하려는 회피 행동을 보였다”며 “이는 고통을 느낀다는 증거”라 주장했다
독일의 동물보호법은 물고기도 감각이 있는 동물로 간주한다. 침팬지나 개, 고양이와 동일한 선상에서 물고기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물고기를 정당한 사유 없이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는 처벌받는다. 동물단체는 어망에 갇혀 산 채로 질식시키는 대신 어획 즉시 기절시키도록 하는 ‘윤리적 어획’을 요구하고 있다. 물고기를 정당한 사유 없이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행위는 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한국은 1991년 제정된 동물보호법을 보면, 어류도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또 같은 법 8조는 △유흥 등의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 △공개된 장소에서 죽이거나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행위 등 동물 학대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다만 식용의 경우는 예외로 둔다.
물고기나 새우, 게, 바닷가재 등 사람들이 즐기는 해산물은 모두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03년 영국 로슬린연구소 과학자들은 무지개송어의 입술에 벌독이나 산성 용액을 떨어뜨리면 수조 벽면이나 바닥에 입술을 문지르고, 최대 속도로 헤엄칠 때와 같은 호흡 수를 나타내는 것을 확인했다. 이들은 송어 입술에서 감각 세포가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행동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