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갯속에서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으로 안개가 조금이라도 거치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아득한 풍광처럼 가끔씩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으시면서 뒤에 타고 있는 막둥이가 괜찮은 지 슬쩍슬쩍 뒤돌아보는 아버지의 모습. 바지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아 막둥이 손에 쥐어 주며 슬며시 미소 짓는 아버지의 얼굴.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집에 들어오시면 막둥이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막둥이를 제일 먼저 찾으시던 아버지의 모습. 밤만 되면 아버지 옆에서 자겠다고 떼를 쓰는 막둥이를 못 이기는 척 안으며 토닥거려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TV 드라마에서 아버지 관련 에피소드가 나올 때나 아버지에 대한 회고를 다룬 책을 볼 때면 문득문득 생각나는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다.
내가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 기억들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나 형들에게 들었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아버지는 무척이나 나를 아끼고 이뻐해 주셨던 건 분명하다. 아버지가 마흔이 훌쩍 넘어서 갖게 된 늦둥이라서 그러셨는지 나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애틋하게 챙기셨으니 막내인 나로서는 얼마나 아버지를 잘 따랐겠는가… 형들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말 그대로 껌 딱지처럼 아버지 옆에 딱 붙어서 하루 종일 아버지만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아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항상 아버지가 함께하고 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즈음 한 번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들~!, 아빠가 너에게 해준 게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아빠가 너에게 어쩌면 제일 중요하고 소중한 걸 해준 게 있는데
그게 뭔 줄 아니?"
"뭐지?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게 워낙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ㅋㅋ"
“그건 말이야… 음… 아빠 그 자체야.
넌 아빠가 이렇게 버젓이 네 옆에 있잖아.
난 어렸을 적에 아빠가 없었거든…
그래서 아빠 있는 친구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었어…”
무슨 얘기인지 금방 와닿지 않았는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갑자기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대뜸 아들 녀석은
“맞네, 난 이렇게 아빠가 있으니까 든든하고 행복한 거네 ㅎㅎ”라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랬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내가 제일 부러웠던 거는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었다.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1년에 한 번씩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라는 걸 했다. 부모 직업부터 시작해서 집, 자동차, 가전제품 소유 여부까지 별의별 게 다 조사항목에 있었다. 매년 반복되던 가정환경조사, 나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이다.
오늘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읽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을 때까지 화장실 한 번을 안 가고, 물 한잔도 안 마시고,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4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정독을 했다. 장르는 장편소설이었지만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이며 사모곡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게 된 작가의 소회가 물씬 묻어져 나온 글이었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연을 맺었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장례식장에서 만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살아생전 알고 있었던 아버지다운 아버지의 모습들을 회상하면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꾸밈없이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고, 이내 나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잊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기억하며 문득 내 아들은 훗날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나는 내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등등 많은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기억들을 소환해 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줬다.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이다…
사진 :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찍었던,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