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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Nov 09. 2023

생전 처음 나온 해외에서 길을 잃다

그리고 해외에서의 첫 인연

나의 모교대학 우리 학과에는 독일로 어학연수를 보내주는 장학 프로그램이 있다. 한 달이라 연수보단 '장기여행'에 가깝지만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외를 못 가봤기에 꼭 기회를 잡고 싶었고, 그다음 학기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뮌헨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기억으로 7명 남짓의 동기와 선후배들이 함께 갔던 것 같다. 각자가 알아서 배정된 뮌헨대학 기숙사로 찾아가야 했다. 


23살, 그렇게 내 인생 첫 해외는 독일이었다. 생전 처음 접한 뮌헨 중앙역의 공기는 매캐했고 낯선 교통 시스템과 커다란 사람들의 크기는 나를 압도했다. 나는 종이로 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더듬더듬 기숙사가 있는 역에 내렸다. 



나의 첫 해외, 뮌헨. 사진은 뮌헨 마리엔플라츠. (출처=Sergey Mind on Unsplash)


자, 이제 기숙사 건물로만 찾아가면 되는데 길치인 나는 도무지 방향도, 위치도 알 수 없었다. 당시 구글맵도 상용화되지 않았고 독일 심카드조차 없이 왔기에 핸드폰은 무용지물이었다. 내 손에는 달랑 종이 지도 한 장과 주소가 쓰인 쪽지만 들려있었다. 당시 내 독일어는 고작 B1(여행회화) 수준이었는데, 외국어를 배워보신 분이라면 아실 거다. 책상공부로 딴 자격증과 실전에서 쓰는 언어의 수준이 결코 같지 않다는 걸.


지나가는 독일인들의 옷가지를 붙잡고 서툰 독일어로 길을 물었고, 그들은 친절히 길을 알려주었다. 문제는 그래도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는 나에게 있었다. 구글맵이 있었다면 5초 만에 해결될 일을 나는 그렇게 혼자 40분을 같은 동네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으니 마치 방탈출 게임에 빠진 것 같았다.


그 때, 먼발치서 키가 엄청 큰 양갈래 머리의 여학생 한 명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생김새가 영락없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녀는 딱 봐도 키가 최소 180은 돼 보였고, 옥토버페스트에서 주로 입는 남독일 전통 의상인 Dirndl(디른들)을 입고 배낭을 메고 있었다. 나들이를 다녀온 모양이다.


너 혹시 길 잃어버렸어?

  



인사도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나보고 길을 잃었냐던 그 아이는 중국에서 교환학생을 온 24살 대학생이었다. 한 살 많은 언니군. 손에 쥐고 있던 주소를 보여주니 자기도 그쪽으로 가던 길이라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도 채 되지 않아 기숙사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데 나는 뭐 한 걸까?


나의 첫 해외에서의 첫날, 방황하던 나에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길을 알려준 그 친구는 내 생에 첫 '외국인 친구'가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도 같은 기숙사 옆 건물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상해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학사를 마치고 독일에서 석사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당시 한국의 모교에서 석사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우리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국적마저 초월하는 인연이란 게 존재하는 걸까. 

연수를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학사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석사 1학기까지 마쳤으나,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었고, 혼자 유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독일로 유학길을 떠나기 전 정확히 4개월 의 시간이 있었다. 문득 그 친구생각이 났고, 많이 보고 싶었다. 내가 그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뭘까. 친구의 모국어를 배우고 싶었다. 좋아하는 친구의 언어로 대화하고 싶었다. 그게 내 첫 중국어 공부였다. 당시 지금 남편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렇게 HSK1, 2, 3, 4급을 딴 후 독일로 왔다 (독일 와서 안 쓰니 급속도로 까먹었지만).


내 인생에서의 독일, 그리고 중국에 관한 인연을 모두 그 친구가 열어준 셈이다.


우리가 독일서 다시 만났을 때, 친구는 말한 대로 독일에서 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린 마치 계속 만나온 절친처럼 죽이 잘 맞았다. 국적도, 전공도 다르고 비록 둘 다 외국어인 독일어와 나의 어설픈 중국어로 대화하고 있지만 그 친구도 나도 서로가 둘도 없는 친구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그 뒤, 친구는 독일 자동차 기업에 취직하여 베이징으로 주재원을 갔고, 나를 중국으로 초대했다. 다음 해에는 반대로 내가 한국으로 그 친구를 초대했다. 지금까지도 친정에서 쓰고 있는 중국풍 그릇은 모두 그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친구가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이뤄나가는 걸 보며 나 또한 참 자랑스럽고 기뻤다. 언니를 갖고 싶던 어릴 적 나의 꿈이 이뤄진 것 같기도 했다.




야속하리만큼 빠른 시간이 지나 어느새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무심한 듯 나를 챙겨주던 키 큰 소녀 같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친구와 아이들의 선물을 보내줘야겠다. 



제목, 본문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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