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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Nov 23. 2023

외롭지만 편하다고 주문을 외워

너는 내가 보이니

몇 달 전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통증 빈도가 잦아져 큰 맘먹고 정형외과에 다녀왔다. 예약이 3주 안에 잡히는 병원을 운좋게 터놓은 이후로 이젠 아파도 겁이 나지 않는다. 무려 3주만 참으면 병원에 갈 수 있어! 이 정도면 독일에선 거의 5G 속도다 (치과제외. 치과는 1주일 안에 잡힌다). 마치 손님이 늘어나면 가기 어려워지는 맛집처럼 이런 병원은 나 혼자만 알고 싶다.




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아있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오셨다. 대기실에는 나를 포함하여 총 3명이 앉아있었다. 


(다른 환자들을 보며) "여기가 엑스레이 대기실인가요?"

할머니는 두 사람을 연달아 쳐다봤지만 내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독일에 살면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대화할 땐 당연하고 높은 사람과 술 한잔을 할 때도 눈을 마주치는 게 예의이기 때문이다. 눈을 보지 않고 말하는 건 말의 방향과 관심이 그 사람을 향해있지 않다는 뜻. 아까 그 할머니는 분명 나를 제외한 타인들만 봤으니, 나에게 묻지 않은 것이다.


가끔 이런 어이없는 상상도 한다. '저 사람 눈에 내가 보이긴 하겠지?'




'어차피 대답하기도 귀찮았는데, 잘됐지 뭐.'


이렇게 스스로 주문을 외워보지만 솔직히 그 짧은 찰나에 외로움이 스쳐갔다. 나도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인데 왜 그 사람 눈에 나는 보이지 않았을까. 왜 나를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걸까.


그 할머니의 인성이 별로라서? 내가 모를 것 같아서? 정답은 '내가 외국인이어서'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를 받았고 지금도 매년 수 만 명의 외국인들이 유입되는 독일이지만 외적으로 딱 봐서 독일인이 아니면 바로 외국인으로 정의되어 버린다. 게다가 외모가 비슷한 유럽인도 아니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단박에 당신은 그냥 이방인이다. 독일어를 못하거나 독일 문화를 모를 것이라 생각하니 그들은 나에게 어떠한 정보나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처음부터 질문조차 안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인종차별은 아니다. 외모로 외국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직관적인 판단이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데 저 사람이 독일서 태어났는지 한국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래서 별로 기분 나쁜 일도 아니다. 


단지, 5년을 살아도 10년을 살아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기에 '설령 여기서 국적을 얻더라도 그들 눈에 나는 평생 외국인이겠구나'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사실이다. 독일에서 20년을 산 베트남 친구도(독일국적), 30년을 산 한국 지인도(독일국적) 밖에 나가서 말을 하거나 심지어 여권을 펼쳐서 보여주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들을 독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입장을 달리 해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조나단이나 한국으로 귀화한 터키인 알파고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직도 "찐 한국인이네"와 같은 말을 한다. 이 말엔 '한국인이 아닌데(아니었는데) 마치 한국인 같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태어난 나라보다 한국이 더 편한 그들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외국인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 산 이래로 가장 크게 변한 부분 중 하나는, 처음 보는 사람의 국적을 미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느낌이 와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외모로 부모님의 뿌리 정도는 추측할 수 있으나 그게 상대방의 모국어나 국적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제목 사진출처: Petr Magera on unsplash

본문 사진출처: Kelly Sikkem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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