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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Nov 27. 2023

언어 세 개 한다고 면박을 당했다

겨우 세 개?

대학원 졸업 후 첫 직장을 찾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대기업의 독일지사에 지원을 했고, 며칠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약 2시간 반이 떨어진 거리였는데 마침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나름 차려입는다고 정장을 입고 구두까지 신었던지라 기차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바지의 1/3이 젖어있었다. 


몰골은 시원찮아도 면접은 잘 보고 싶었기에 내심 긴장이 되었다. 




면접에는 두 분이 들어왔다. 인사 담당자가 다른 한 분께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마 입사하게 되면 그분의 하위조직에 들어가게 될 모양이었다. 


면접은 큰 어려움 없이 끝났다. 사무실이 멀어 근무하게 되면 이사가 가능하겠냐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부장이란 그분은 이내 자리를 떴다. 나도 정리하고 일어나려는데, 인사 담당자가 다른 질문이 있는 듯했다. 


"언어는 몇 개 한다고 했죠?"

-"독어, 영어, 한국어 총 3개 구사합니다."


당시 중국어 자격증이 있었지만 업무에 쓰기엔 부족했으므로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같았으면 당당히 4개라고 하겠지만 남편을 만나기 한참 전이기도 하고 회화에 자신이 없던 터라 업무에 가능한 언어만 적었다.


언어 3개 구사가 많은 건 아니다. 하지만 업무를 못 할 정도로 적은 개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사 담당자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내 이력서에 얼굴을 박고 있던 그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3개? 3개는 아무나 다 해요. 우리 부장님은 4개 하시거든요? 여기 3개 못하는 사람이 어딨어. 3개면 뭐 한다고 볼 수도 없네."

-"..."


지원자의 이력을 까내리는 듯 한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매우 불편했지만, 나는 지원자였고 나중에 다시 볼 수도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냥 미소로 마무리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독어와 영어 그리고 학교에서 다른 유럽어를 하나 더 배우기 때문에 실제로 3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당시 사회경험이 없던 나는 인사 담당자의 못마땅한 말투가 정말 실망할 만한 점인지, 아니면 그냥 까내리고 싶었던 건지 확신이 안 섰기에 오랜 기간 찝찝함만 남겨놓았었다. 


사회 경험이 쌓이고 수많은 인터뷰를 경험한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찝찝함과 싸함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외국어와 친한 유럽인들이라고 해도 여러 개 언어를 모두 동등하게 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다개국어 구사자라도 업무언어는 1-2개이기 때문에 업무에 문제만 없다면 3개를 하든 30개를 하든 회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큰 관심도 없다. 


즉, 3개 한다고 면박 주고 4개 한다고 브라보를 외치는 곳은 여태 단 한 곳도 없었다.




또한, 면접 당일 대화에 등장했던 '부장님'은 교포 아닌 순수 한국에서만 근무하다 온 분으로, 4개 국어를 한다는 건 인사 담당자의 개인적인 정치질 및 텃세였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면접 며칠 뒤 나는 오퍼를 받았지만 고민하지 않고 고사했다. 비를 쫄딱 맞고 이사까지 감수할 생각으로 지원한 신입 지원자에게, 아직 자기들 사람도 아닌데 그토록 면박을 주고 지원자의 이력을 깎아내리는 회사라면 입사 후의 모습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면접은 한쪽만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지원자 역시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노동력을 바치며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회사인지를 시험하는 자리이다.


제목 및 본문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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