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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Dec 25. 2023

크리스마스에 무급인턴을 합니다

사심 채우기

매년 12월 24-26일, 크리스마스는 독일에서 가장 조용한 날이다. 대부분의 식당을 비롯한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한 달 가까이 도시를 환하게 밝히던 크리스마스 마켓도 다 철수하는 기간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선 그동안 만나기 어려웠던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선물을 풀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눈다. 먼 길, 심지어 해외라도 웬만하면 가족을 만나러 온다는 점에서 우리의 옛 명절 모습과 비슷하다. 최근 한국의 명절은 가족이 모이기도 하지만 각자 여행을 떠나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 가족이 모이는 비율은 독일이 더 높은 것 같다. 




독일에 오래 살았어도 크리스마스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우리는 주로 집에서 쉬거나 동료들의 대체업무를 맡아주는 편인데, 올해는 여기에 작은 일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캣시터로 나선 것이다. 


이웃이 집을 비우는 동안 고양이 두 마리를 돌봐주기로 했다. 그동안 캣시터/독시터를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경험이 적어 플랫폼에 시터로 등록하고 돈을 받기 미안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연습삼아 해보는 것이니, 무급인턴이나 다름없다. 부탁하는 이웃은 고맙고 맡아주는 나는 이참에 집사 노릇도 해보고 고양이의 습성까지 배울 수 있으니 둘 다 윈윈이다.


이웃은 브숏(브리티시숏헤어, 독어줄임말 BKH)으로 추정되는 1살짜리 삼색이와 턱시도를 한 마리씩 기르고 있는데 둘의 생김새부터 성격과 노는 취향까지 너무 달라서, 마치 소규모 인간군상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왼) 턱시도 / (오) 삼색이. 사냥놀이중인 남편의 손. (출처=직접촬영)


얼굴이 둥글둥글하고 제법 살집이 있는 턱시도는 사람 안 가리고, 잘 먹고, 잘 논다. 그렇게 낯을 가린다는 고양이가 처음 보는 사람인 나를 보자마자 몸을 비벼대고 사냥놀이도 곧잘 따르니 분명 외향형(E)이 틀림없다. 삼색이 밥도 뺏어먹고 캔 따는 소리가 들리면 부르기도 전에 내 옆에 온다. (독일에서 집사를 부르는 단어는 'Dosenöffner 캔따개' 이다. 인간은 캔을 따주는 도구일 뿐이다.)


얼굴이 조막만 하고 살짝 마른듯한 삼색이는 옆집 열쇠소리만 나도 귀를 바짝 세울 정도로 예민하고, 잘 안 먹고, 노는 것도 굉장히 소극적이다. 턱시도가 노는 모습을 빤히 보다가 저도 같이 끼고 싶어서 오는데 틈을 비집고 들어오질 못한다. 행동 하나부터 열까지 극 내향형(I)의 특징을 보인다. 턱시도 고양이가 보고 있으면 심지어 밥도 안먹는다.

 



너무 다른 두 고양이. 특히 삼색이는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많이 예민했고, 음식을 가렸고(지금은 다 잘 먹는다), 외향형이 셋 이상 모이면 입을 다물고 나의 존재를 감추는 편이다. 그렇다고 성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위험부담을 줄이려다 보니 반대로 장점도 쉽사리 드러나지 않아서, 나와 좋은 인연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오래 혹은 자주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턱시도 고양이처럼 -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강점이 있는지 -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껏 부풀려 포장은 못할망정, 좋은 게 있는데 마치 없는 것처럼 감출 필요도 없다는 거다. 


아무튼 이렇게 무급인턴 캣시터로 사심 채우며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도 가지니 올해 크리스마스는 참 행복하다.  


제목 및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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