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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Oct 10. 2023

줄서기에서 해방되었다

독일영주권

그 때로부터 벌써 4년이나 지났다.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다.


독일 연속거주 4.5년이 되던 해. 

그동안 독일 내에서 이사만 5번. 드디어 지긋지긋한 독일 체류권 연장에서 해방될 권리가 주어졌다 (연속거주란 해당 기간 동안 독일에서 전출신고(Abmeldung) 기간 없이 계속 유효한 체류권이 있던 상태다).


체류권 연장이 필요 없다는 건 곧 '영주권'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자주 혼동되어 쓰이는 영주권과 시민권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영주권은 '그 국가에 합법적으로 영구거주할 수 있는 권리'다. 즉 영주권을 가져도 여전히 한국인이며 사는 곳만 해외가 되는 것이다. 보통 영주권자는 투표권이 없으며 독일도 그렇다. 시민권은 '그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즉 시민권을 획득하면 그 나라 시민이 되어 여권도 바뀌고 투표권도 행사할 수 있지만, 한국에 오면 외국인이 된다. 인천공항 입국할 때 -외국인 여권- 줄로 가야 한다.


영주권 조건을 모두 충족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비자청(외국인청)에 연락을 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타의에 의한 초미라클 모닝(새벽2시 기상해서 나가기)과 줄서기로부터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 곧바로 예약을 잡아줄 것 같던 비자청은 내가 "조건 불충분"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두어 번의 메일에도 같은 답이었으나, 나는 사람이 하는 말보다 글로 쓰여있는 법규를 믿기로 했다. 아무리 백 번 아니라고 해도 맞다고 쓰여진 법전 한줄의 효력이 크다. 그리고 내 조건은 독일 이민법에 명시된 '독일 대학 졸업자의 영주권 신청조건'에 정히 들어맞았다. 


독일서 고등학습기관(대학 혹은 그에 준하는 기관)을 졸업했으며 졸업 후 24개월 이상 정상적인 기업의 정규직원으로 연금보험을 빠짐없이 납부했다. 독일어 과정으로 학위를 했으니 따로 독어증빙은 필요 없었다 (내라고 하면 새로 시험 볼 계획이었다). 내가 신청할 때에는 Leben in Deutschland(시민권시험)이 필요 없었으나, 최근에는 영주권에도 이 시험 합격증을 요구한다고 한다. 문제은행이고 매우 쉬워서 독어 못하는 외국인도 합격하는 시험이니 보는 분들은 겁내실 필요 없다.


이처럼 조건이 맞았기에 나는 비자청의 메일을 뒤로하고 무조건 예약을 잡고 천천히 서류 준비를 했다. 


비자청에 가던 날 흐드러지게 핀 꽃


영주권 신청서, 독일학위증, 주소등록서류, 직장계약서, 월급명세서, 연금납부서, 보험증 등 다 모아놓으니 수 십장에 달했다. 역시 독일은 아날로그의 나라다. 많은 부분에서 디지털화가 되고 있지만 중요한 과정에선 종이서류와 수기사인이 빠지지 않는다. 


여태 비자청을 방문하며 이토록 가슴이 뛴 적은 없던 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과 마지막이 가장 떨리는 법이다. 그리고나는 직감적으로 이번 비자청 방문이 마지막임을 알았다. 




독일비자청에서 '신청'을 받아주었다는 건 90% 이상 발급에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10% 여지를 남겨둔 이유는 검토 중 불가피한 상황에 따라 신청이 보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근로비자(노동허가체류증) 신청 때 겪었다. 다행히 내 영주권 신청은 90에 속했다.


3개월의 서류준비와 방문예약

6주의 발급 기간

4주의 픽업예약 대기까지


5개월이 넘는 22주의 대장정이 끝나고 드디어 영주권이 손에 들어온 그날, 나는 좁은 차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언의 해방감을 느꼈다. 생을 마감할 때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던가. 영주권 카드 위로 더위와 추위를 뚫으며 비자청을 방문했던 지난날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내가 영주권을 취득하려던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비자연장의 고생스러움과 그로 인해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나라, 독일에 대한 미움이 커지는 것을 그만두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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