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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Oct 12. 2023

차를 드세요

차는 만병통치약

독일에 사는 한국인들이 유독 참을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독일의 택배시스템과 병원시스템이다. 


택배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먼저 병원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한국 의료시스템이 잘 되어있고 건강보험이 저렴하다는 건 너무나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든 원할 때 예약 없이 어느 전문의나 찾아갈 수 있고, 못해도 처방전이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병원 수도 많다. 




독일은 일단 '원할 때 병원 가는 것'부터 마음대로 안 된다. 

가벼운 감기나 모호한 증상의 경우, 우리나라로 치면 일반내과에 해당하는 Hausarzt(가정의)를 가야 하는데 방문예약 잡는 게 쉽지 않다. 


그냥 무작정 가면 10이면 8은 진료를 못 본다. 소수의 경우 장시간 기다려서 볼 수 있다.

새 환자는 온라인 예약은 안되고 전화/메일예약만 받는 병원이 많다.


가정의 첫 방문 시 작성해야 하는 문진표. 여긴 6장이었다. 수기로 작성해야 한다.


병원마다 할당 환자량이 정해져 있고, 초과분은 받아봤자 의사한테 떨어지는 보수가 적기 때문에 이미 등록 환자가 충분한 병원은 환자를 안 받으려고 한다. 새 동네에서 가정의를 찾는다면 일단 '나를 받아주는지'부터 문의해야 한다. 만약 받아준다면 당케쉔(감사)을 외치고 그곳이 곧 내 주치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입지가 약한 가정의학과가 독일에선 개개인의 주치의(전담의) 역할을 하는데, 주치의의 역할은 환자의 과거 이력, 가족력, 현재상태를 상세히 파악하고 필요시 전문의한테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한 동네에서 오랜 기간 산 독일인들은 가족 전체가 한 가정의에게 수 십 년 다녀서, 의사와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보험사들이 Hausarztprogramm(가정의프로그램)이라는 걸 시행해서 아예 환자의 전담의를 1년 단위로 고정시켜 버리기도 한다. 여기 가입한 환자는 가정의를 바꿀 수도, 바로 전문의에게 갈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는 전문의한테 바로 가는 것도 가능하다

관절이 아픈데 가정의한테 가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바로 정형외과에 가는 게 백 번 효율적이다. 그러나 이 경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지금 아픈데 2-3개월 후 예약이 잡히는 것도 아주 흔하다. 만약 가정의가 써준 환자 의뢰서가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전문의를 만날 확률이 높다 (무조건 가능한 건 아니고 두 달을 한 달 반으로 줄여주는 정도랄까). 가정의가 협력관계의 전문의를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독일에 산다면 가정의도, 전문의도 다 필요한데 매달 수 십 만원씩 내면서 예약 자체가 힘든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렇다 보니 독일에서 아프다고 하면 일단 "Trinken Sie Tee (차를 드세요)"라고 하는 웃지 못할 말이 생겼다. 열이 나도, 기침해도, 콧물이 나도, 머리가 아파도, 배가 아파도 일단은 차를 마시면 된단다. 독일 드로게리 스토어에 가면 온갖 약차 종류가 있다. 감기차, 기침차, 수면차, 스트레스 완화차, 복통차, 안정차 등 셀 수도 없다. 실제 효과가 있는지는 글쎄. 플라시보 효과라고 생각하고 마시면 된다.


독일에서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이 아프다면 종합병원 응급실을 달려가시라. 개인병원은 응급증상을 봐주는 곳이 아니며 이 개념이 명확히 지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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