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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Jan 28. 2024

우리 부서엔 조용한 만담가가 있다

우리 부서는 나를 포함 총 10명이다. 

열 사람 모두 비슷하거나 완전히 같은 업무를 하지만, 각자 담당 분야가 나눠져 있어서 사실상 한 두 사람씩 실무팀을 이룬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는 독일인 남자 직원으로, 액면가 높은 대부분의 서양인들과 다르게 동안이어서 나보다 어린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4살이나 어렸다. 동안이라고 하면 좋아하는 건 만국 공통이니, 솔직히 노안으로 보여도 동안이라고 해주는 게 좋다. 돈 들고 피해 보는 거 아니면 이왕이면 말은 듣기 좋게 하는 게 좋으니까. 


내가 입사했을 당시 그 동료는 휴가 중이었고, 복귀 후 화상회의로 얼굴을 처음 봤는데 머리카락도 수염도 하나도 없어서 탈모요정을 피하지 못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눈코만 빼꼼히 보일 정도로 얼굴에 털이 덥수룩하다. 알고 보니 종교적인 이유로 삭발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친구는 말수가 꽤 없는 편이다. 말의 속도도 독일어 레벨 C1 듣기 평가 정도로 그다지 빠르지 않고(듣기평가보다 빨리 말하는 현지인이 많으니 그정도면 느린 것이다), 목소리 톤도 일정하여 듣고 있으면 잠이 올 것 같은 목소리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 때문에 '귀에 피가 날 같은' 경험을 했다. 많은 사람과 얘기하면 보통 진이 빠지거나 기가 빨리는 느낌이 드는데, 그날은 정말 귀에 피가 날 같다는 표현 외에 다른 말로 설명이 되었다. 


총 4명이 참여한 미팅에 그 동료와 타 부서 엔지니어 동료 한 명이 도면 하나를 두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각자 의견과 생각하는 개선점이 다르니 서로 할 말이 많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동시발언 즉, 두 사람 모두 말이 겹쳐도 발언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남의 말을 자르거나 내 말이 남에 의해 잘리는 것에 민감하기 때문에 최대한 끝까지 듣고 말하거나 양해를 구하고 중간에 치고 들어가는 편인데, 이건 뭐 오디오 두 개를 동시에 틀어놓고 같이 듣는 것 같아서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엔지니어 동료가 먼저 발언을 끝냈지만 우리 팀 동료는 말을 이어갔다. 'Reden ohne Punkt und Komma(마침표와 쉼표 없는 발언)' 그 자체였다. 종료 버튼 고장 난 오디오처럼 10분이 넘도록 일정한 톤으로 쉬지도 않고 질문도 없이 얘기하는데, 아무리 편안한 목소리라도 틈이 없으니 한 7분째부터는 그냥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그냥 얼른 회의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동료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업무에 관련 있고 도움 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전달방식이 적절치 못하니 절반도 반영되지 못한 것 같았다. 토론을 시작한 엔지니어 동료를 포함해서 나와 다른 동료는 그냥 청자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복식 테니스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1인 스쿼시가 된 것이다. 이 친구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그 열정을 1/4씩 쪼개서 시간적 틈을 두고 말했다면 훨씬 퀄리티 높은 회의 결과가 나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언어를 불문하고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명확히 다른 문제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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