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의 대명사 한국에 살던 사람이 독일에 오면 속이 터진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무지 빠른 게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 '만만디(천천히)' 문화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피부로 만만디를 느낀 건 중국이 아니라 이역만리 떨어진 전혀 다른 나라, 독일이었다.
독일어로 '느린'을 뜻하는 형용사 'langsam 랑잠', 명사형으로는 Langsamkeit 랑잠카이트 (느림).
내가 독일에서 처음 이 랑잠을 가장 충격적으로 경험한 건 관청도, 은행도 아닌 대학이었다. 관청이나 은행은 애초부터 우리나라만큼의 속도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이 적었지만 대학은 달랐다.
한국 대학에서 수강신청 날엔 모든 학생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한 시간 전부터 손에 땀을 쥐며 대기한다.
듣고 싶은 강의를 온라인에 띄워놓은 다음 신청 시간이 시작함과 동시에 거의 광기에 가까운 무한 클릭을 반복해야 한다. 전공을 포함, 인기가 많은 수업은 공석대비 희망 학생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선착순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수업을 포기하거나 6개월, 길게는 1년 뒤로 미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학기를 결정짓는 시간표가 단 몇 초만에 클릭순서로 완성되어 버린다.
내 대학시절부터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 그래서 수강신청 당일 학생들의 심리는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 같다.
독일 대학의 수강신청은 방식부터 달랐다.
지금은 대부분 디지털화가 되었지만 내가 신청하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강의를 '서면으로' 신청해야 했다. 첫 학기, 한국의 수강신청일이 떠올라 노파심에 신청 당일 아침 8시경 수강신청함에 넣었는데, 지나가다 우연히 본 학생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급하게 안 해도 돼. 아직 시간 많아."
초면이었는데 오죽 급해 보였으면 말을 해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내가 학교 1등으로 신청서를 넣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수강신청은 한 달간 지속되었으며, 마지막 날이 돼서야 신청서를 넣는 학생이 많았다. 심지어 그마저도 최종 신청이 아니라 추가신청과 신청철회 기간이 따로 잡혀 있었다. 즉, 수강신청+추가신청+철회까지 약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있던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과정이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되지만, 여전히 1~2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진다. 늦게 신청했다고 자리를 못 받는 경우도 거의 없기에 수업을 들어보고 최종 결정을 하는 학생들이 많다.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학생들의 배움을 위해 설립된 기관에서 학생들이 마음편히 수업하나 듣지 못한다면 정말 웃지 못할 슬픈 일이다. 적어도 나는 수강신청만큼은 독일 시스템을 지지하고 싶다.
모든 게 다 느리고 대학 수강신청마저 느린 이곳.
행정처리나 일처리를 해야 할 땐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 답답함을 주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서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경우는 한국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느려도 행정처리에는 여전히 실수가 많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오퍼를 줄 때도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승낙하라'는 통보 개념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해보고 질문이나 상의할 점이 있으면 연락 달라'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란 소리다. 구직자는 통상적으로 짧게는 1주, 길게는 약 2주 간 충분히 고민하고, 가족들과 상의하고, 조건이 더 좋은 곳이 있다면 이 기간 동안 기다려보고 재협상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랑잠법칙'을 중고거래 할 때 자주 사용한다.
특히 소비에 있어서는 급하게 구매하면 충동구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판매자일 때는 구매자에게 '충분히 생각해보고 결정하라'라고 하며, 구매자일 때는 '생각해 보고 언제까지 연락 주겠다. 그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팔아도 좋다'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하니 판매자로서 꽤 신뢰도가 쌓였는지 내 프로필에 표시되는 평가가 상당히 좋다.
무엇이든 결국 Bauchgefühl(직감)에 따라 결정한다고 해도 급하게 결정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조금 더 시간을 내어 '내 결정의 타당성'을 견고히 하는 게 좋다. 다행히 아직까지 독일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 같다.
제목 및 본문 사진출처: 직접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