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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Mar 18. 2024

법적 불가와 의지 불가

독일 생활에서 자주 듣는 말들 중 두 가지 단골멘트가 있다. 


"안 됩니다."

"가장 빠른 예약은 n개월 뒤입니다."


뭐만 하면 안 된다, 물어봐도 안 된다, 예약을 잡으려고 하면 몇 주 혹은 몇 개월 뒤에나 된다는 소리. 병원은 그럴 수 있으나 관청도 매일 병원만큼 붐비고, 병원만큼 응급상황에 대한 여지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 10년이 넘도록 그런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독일에 얼마 살지 않은 분들이나 독일 관청에 익숙하지 않은 유학생들은 '독일 기관들은 참 예약이 많은가 보다. 예약 기다리느라 몇 개월을 그냥 보냈네'라고 생각하실지 모른다. 나도 그땐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건 큰 착각이다. 




'안 되는 것'과 '안 해주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다. 

전자는 법적 근거가 있는 불가이고, 후자는 의지가 없는 불가이다. 독일에선 이 두 가지를 확실히 구분하여 대처해야 한다. 


아, 물론 전투의지가 없거나 갈등을 극도로 꺼리는 분이라면 이쯤에서 글 읽기를 멈추셔도 좋다. 그러나 분명한 건 독일살이에 전투의지가 없으면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거나, 매번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약점 잡히는 생활의 연속이 되기 십상이다. 


급해 죽겠는데 관청에서 일을 미루거나 예약을 얼토당토않은 시기에 잡아준다면 확실히 물어보자. 


Ist es gesetzlich unmöglich? oder wollen Sie nicht?
법적으로 불가합니까? 아니면 안해주려고 하는 겁니까?


그리고 이 말에 이어 '빠른 시일 내에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이 대화를 위해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내 상황을 어필하는 빌드업이 필요하다. 다소 피곤하지만 밑져야 본전, 시도할 만하다. 




실제로 내 지인의 남편이 독일 근로비자를 신청할 때 약 4개월 뒤로 예약이 잡혔다. 

독일 근로비자는 신청+대기 기간 동안 수입활동을 전혀 할 수 없으니, 4개월 뒤 신청한단 소리는 최소 반년(예약+발급대기) 이상 수입 없이 손가락 빨으라는 뜻이었다. 뭐 외국인 하나가 반 년동안 비자 때문에 생활이 어렵든 말든, 독일 관청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알 바 아니니까. 


이 상황을 지켜본 내 지인인 와이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생활에 직격탄을 맞을 상황이니 매우 급박하기도 했을 거다. 그녀는 관청에 전화를 걸어 '예약이 늦을 수밖에 없는 법적 근거'를 대라고 했고, 덧붙여 '고등교육을 받은 정상적인 취업자가 반년 간 일을 못하게 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심지어 독일서 좀처럼 보기 드문 언성까지 높였다. 


그리고 


4개월 뒤에 잡혀있던 남편의 예약이 단숨에 이틀 뒤로 당겨졌다. 




다시한 번 말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관청 전화 무서워 하지도 말고(그들도 그냥 직장인일 뿐이다) '법적인~'이라는 단어를 넣어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할 법한 말들을 언제든 총알처럼 장전해 두자. 비록 에너지 소모는 상당하지만 범법이 아닌 이상 불가능은 없으며, 논리적으로 징징대는 사람한테 떡 하나 더 주는 나라라는 걸 잊지 말자. 



제목 사진출처: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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