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스템을 언뜻 보면 계획을 좋아하는 파워 J에게 잘 맞는 것 같아 보인다.
직장에서는 연말부터 내년 여름휴가 계획을 묻고, 집이나 퇴사 등 각종 계약의 해지도 3개월 고지기간이 있으며, 서류처리는 아무리 짧아도 4주를 계획해야 한다. 전기세의 경우도 매월 고정 지출을 계획할 수 있도록 월정액을 정해놓고 요금을 지불한다. 또 계약서나 규칙은 어찌나 많은지 '이 많은 걸 다 지키고 어떻게 살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 이 정도면 J들이 모여서 만든 나라가 독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J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곳이 바로 독일이다.
아무리 계획하고 일정을 다 짜놓아도 기차나 비행기가 하루 전 혹은 당일 갑자기 캔슬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시간별로 계획 짜놓고 움직이는 사람에게 이런 일은 청천벽력 같은 스트레스 폭우나 마찬가지다. 계약을 해지하는데 3개월씩이나 걸리기 때문에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지나치게 지연되거나 '나의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서류처리는 4주로 명시하지만 중간에 담당자가 아프거나 휴가라도 가면 6주, 8주 길게는 12주까지 미뤄지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니 내 계획도 담당자의 사정에 따라 변한다.
전기세나 가스비는 고정지출로 '보이는 것'일뿐 실제 사용량에 따른 비용은 1년에 한 번 정산된다. 그래서 매년 4월부터 9월까지는 지난해에 사용한 공과금이나 난방비 초과비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얼마가 나올지 예상하기 어려워서 목돈을 쥐고 있어야 하며, 만약 1유로라도 돌려받거나 추가비용이 안 나오면 그제야 안도할 수 있다.
독일의 연말정산은 한국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운데, 점점 간소화되고 있다 할지라도 관할 세무서나 담당자에 따라 갑자기 '작년 5월에 밥 먹은 영수증 가져와라'처럼 언제 무엇을 요구할지 모른다. 심지어 이미 제출한 영수증도 다시 제출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똑같은 영수증을 세 번 등기로 부친 적 있다). 따라서 1년 치 영수증은 다음 해 연말정산이 끝날 때까지 절대 버리지 말고 끌어안고 있어야 한다.
직장인에게 가장 예민할 수 있는 월급지급을 담당하는 인사과의 실수도 잦아서 (저렴한 해외 외주업체에 맡기거나 더블체크 부재로 발생한다) 얼토당토않은 월급액이 찍히거나 받아야 할 돈을 못 받는 사례도 흔하다. 나는 이전 회사에서 페이를 1년 가까이 잘못 지급해서 수정한다고 3년 간 새 월급 명세서를 매월 받았던 경험이 있다. 하도 수정을 해서 그때 모은 명세서만 두꺼운 서류철이 되었다.
대부분은 담당하는 직원 개인의 실수, 시스템 문제, 기계 결함 등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일어나지만, 그 빈도가 잦고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계획형 성격의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의 일'과 '내 문제가 아닌 것'으로 인해 대비하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수개월이 지나고 지나간 일로 사람을 괴롭히는 건 평화롭던 계획형 인간들의 호수에 돌덩이를 던지는 것이다. 너무 급한 것도 문제지만 너무 지체되는 것도 문제다.
결론: 파워 J라면 '계획이 언제 어디서든 어떠한 형태로든 바뀔 수 있다는 불안'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이 또한 유럽인들의 여유에서 비롯된 문화라고 자기 암시를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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