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여름은 한국보다 습도가 덜해서 대체로 견딜만하다가도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한 번씩 있는데, 바로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날이다. 독일의 헬스장은 대부분 독립된 건물에 있으니 낮에 30도가 넘는 날은 낮동안 받아둔 태양열과 지열이 저녁 10시가 넘을 때까지 헬스장 내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런 날 헬스장 입구에 딱 들어서면, 잘 달궈진 후덥지근한 실내 공기, 여러 사람이 뿜어낸 이산화탄소, 땀냄새 그리고 특유의 액취(암내)가 코를 찌르며 불쾌감과 함께 머리가 핑 돈다. 상쾌하게 운동하며 에너지를 충전하러 왔다가 시작도 하기 전에 오감공격에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곳이 바로 독일 헬스장이다.
독일 90% 이상의 헬스장이 갖고 있는 이 특징은 사실 '에어컨 한번 확 틀어버리면' 끝나는 문제다. 하지만 그게 안되니 이젠 여름에 헬스장 간다고 하면 한두 시간 동안 불쾌감을 어떻게 견딜지부터 고민이다.
그렇다, 독일 헬스장엔 에어컨이 없다. 에어컨있는 헬스장을 일부러 찾아야 할 정도로 드물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어딜가도 에어컨이 드문 독일인지라 더운 날은 '집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 그날도 종일 더위를 꾹 참다 저녁에 헬스장에 갔는데, 하필 바로 옆 러닝머신에 유난히 액취증이 심한 사람이 와서 땀이 튀기도록 열심히 달리는 게 아닌가. 두통이 와서 자리를 바꾸니 이번엔 땀냄새 공격이 들어왔다. 창문을 아무리 열어젖혀도 바람 한 점 없는 날씨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천장을 보니 작은 선풍기 두 대가 끽끽 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마저도 바로 아래에 서있지 않으면 바람이 오지 않았다. 결국 운동을 포기하고 탈의실로 갔더니, 심지어 거긴 선풍기도 창문도 없고 통풍도 되지 않아 숨이 턱 막혔다.
마침 독일인으로 보이는 회원 한 명이 옷을 갈아입고 있길래 나는,
"이렇게 더운데 왜 에어컨이 없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다들 땀을 엄청 흘리던데"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온 그 회원의 대답,
"ㅇㅇㅇ(20분 떨어진 도시 이름)에 가면 에어컨 있는 헬스장이 있어요. 거기 말고는 이 주변에 에어컨 있는 헬스장 없어요. 다 가질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대답 중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내 귀에 꽂혔다.
"Man kann nicht alles haben. (사람은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잖아요)."
가볍게 던진 스몰톡에 새삼 진지하게 돌아온 대답. '역시 독일인다운 대답'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헬스장에 에어컨 두는 게 그렇게 욕심낼 일인가 싶었다. 그녀의 대답은 '대부분의 헬스장엔 에어컨이 없고, 죽을 정도는 아니니 에어컨 없는 건 불만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달리고 땀 내고 냄새나는 헬스장에 에어컨을 두는 건 욕심이 아니라 헬스장의 기본 아닌가?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하는 혹자도 있을 것이다.
"독일은 다 그래. 아직도 그걸 몰라? 적응하면 또 그냥 할 만 해."
아니, 나도 안다. 독일의 특징을 몰라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적응을 못 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너무 잘 아니까 말하는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데 못한다는 건 '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능력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더운 날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기 싫어서 대충 미소 짓는 척하며 마무리했지만, 만약 같은 답변을 다시 듣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Wenn die Klimaanlage 'alles' bedeuten könnte, dann kann ich selbstbewusst sagen: Man kann alles haben. Eine Klimaanlage im Fitnessstudio zu haben, ist einfach eine grundlegende Annehmlichkeit für die Kunden und tatsächlich gibt es ein Land, in dem jedes Studio eine Klimaanlage hat. Dieses Land ist Korea. Nach deiner Logik haben die Koreaner tatsächlich 'alles'."
"만약 에어컨이 '모든 것'을 뜻한다면,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네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헬스장에 에어컨이 있는 건 고객을 위한 편의일 뿐이고, 실제로 모든 스튜디오에 에어컨이 있는 나라가 있어요. 그건 바로 한국이죠. 당신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가졌네요."
퀄리티 낮은 서비스를 기본으로 설정하고, 실제로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필수가 아니라며 눈과 귀를 닫고 정신승리하는 독일의 분위기도 2024년이면 이젠 좀 바뀌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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