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13년을 알고 지낸 독일친구가 있다.
일부러 오래 인연을 이어오려고 애쓴 건 아닌데 꾸준히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가면 손편지나 엽서를 주고받으며 간간히, 때로는 자주 연락을 이어왔다. 무엇보다 내 독일유학 초창기, 생활 중 힘든 일이 있을 때 기꺼이 손 내밀어 도와준 친구였기에 독일생활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참 고마운 친구 중 하나다.
실질적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막상 도와줄 거라 기대했던 한국인들에게선 "잘해봐"라는 카톡 한 통이 전부였지만, 이 친구는 실제로 팔 걷어붙이고 달려와주었다. 비자 문제가 극에 달했던 시기, 외국인청에 함께 항의해 주었고, 추운 겨울 면허가 없는 나를 대신해 이사차 운전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한국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에서 날아오기까지.
독일인들에게 정 떨어질 정도의 차가움을 느끼면서도 내가 그들에 대한 끈을 여태 놓지 않는 건 어쩌면 이 친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에게 돌을 맞아도 나를 믿어주고 손 내밀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
평소엔 잘 보지 않는 와츠앱 스토리를 무심코 본 어느 날, 친구의 업데이트가 올라왔다. 친구의 여자친구, 그리고 두 사람의 가족들이 함께 한 영락없는 '독일 결혼사진'이었다. 독일은 많은 독자분들이 아시다시피, 법적 혼인과 출산이 별개이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고 아이만 낳고 평생 동거하는 부부도 많다. 또한 법적 혼인을 하더라도 '결혼식'은 하지 않는 커플들도 많다. 내 친구가 바로 이 경우였던 것이다.
전형적 독일 결혼식인 'standesamtliche Hochzeit(등록관청 결혼식)'은 말 그대로 관청에 혼인신고를 하는 절차 자체를 결혼식으로 여기는 문화다. 혼인신고를 하고 가족, 친인척 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식사 한 끼를 하면 끝난다.
워낙 신세 진 것도 많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친구의 결혼만큼은 만사 제쳐두고 가려고 했었기에, 나는 사진을 보자마자 연락했다.
"너 결혼했어? 왜 말 안 했어 이건 아니지!"
나에게 말을 안 해서 서운한 것보다, 챙겨줄 기회를 안 준 것에 아쉬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친구는 미안하다며, 아내가 두 달 뒤 출산이고 너무 갑자기 정해진 거라 양가 부모형제들만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진짜 파티'는 2025년 여름에 할 예정이라고, 그때 무조건 시간을 비워두라는 말까지 했다.
내년 파티 날짜를 벌써부터 잡아놓은 것도 참 독일스러운 동시에, 아직 진심으로 축하해 줄 기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이 돌 되기 직전에 결혼식 피로연 겸 파티를 할 예정인가 보다. 우리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내년 달력에 표시를 했다.
20대 학생일 때부터 참 야무지고, 불평 안 하고, 주관이 뚜렷하며 거침없이 도전하는 친구가 드디어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를 만나서 너무 기쁘다. 곧 태어날 아기는 딸이라는데, 예정일에 맞춰 육아용품 한아름 선물해야겠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