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사회. 매사에 비교는 물론 대학은 어디 갔냐, 취업은 했냐, 결혼해야지, 애는 언제 낳을 거냐 등의 질문을 들을 때마다 대충 핑계 대는 것도 지쳤다. 요즘은 그나마 근로자 권리가 좋아져서 회사 출퇴근 시간은 지켜지는 편이지만 상사의 눈치를 보고, 아플 때 제대로 못 쉬고, 휴가 한 번 내기 쉽지 않은 건 여전하다. 물가는 또 어찌나 올랐는지 외식한 번 하려니 15000원은 기본이다. 돈이 모이질 않는다. 이렇게 살다간 평생 집도 못 사고 결혼도 못할 것 같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듯한 일상 속 '다른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혹은 '어디라도 한국보단 낫겠지'라는 막연한 상상과 함께 이민을 꿈꿔본다. 오래전부터 멋지다고 생각해 온 독일로 가면 이런 문제가 단번에 사라질 것만 같다. 거기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유럽이니까.
따스한 햇살이 집안으로 내리쬐는 아침, 천장 높은 유럽식 집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가볍게 빵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나만의 전용 주차장에 세워둔 아우디를 끌고 아우토반을 달려 회사에 도착했다. 역시 차의 강국 독일이니 독일차를 몰아줘야지. 우리 회사는 독일에 본사를 둔 글로벌 대기업이다. 업무 언어는 영어와 독어다. 동료들과 독어로 가벼운 스몰토크를 나누고 회의에선 영어로 미팅에 참여한다. 마침 다음 달 그리스에서 고객사 미팅이 잡혔다. 유럽 내에서 출장을 다니는 건 유럽을 공짜로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어느새 나는 유럽을 누비며 살고 있다.
마침 오늘은 월급날. 한국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액수가 통장에 찍힌 걸 보니 역시 시급 높은 나라는 다르구나 싶다. 월급 받은 기념으로 가볍게 와인을 곁들인 외식을 해주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년 여름휴가는 3주쯤 이탈리아로 떠날 예정이다.
너무 무리한 탓인지 갑자기 몸살기운이 있다. 얼른 병원에 갔더니 친절한 독일인 의사가 오랜 상담 끝에 약을 처방해 줬다. 역시 환자 중심적이고 친절한 의료 시스템에 감탄한다. 회사에서 독일비자 이력을 떼오라고 해서 진료를 마친 뒤 바로 비자청으로 가서 서류를 발급받았다. 차를 두고 왔지만 역시 시간약속을 엄수하는 독일답게 지하철과 버스가 제시간에 와줬다. 이런 걸 보면 독일은 참 시간개념에 민감한 것 같다.
마치 중세 고성 같은 우리 집 건물은 볼 때마다 예쁘다. 문이 조금 무겁긴 하지만 이게 바로 유럽 감성 아니겠는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이 웃으며 인사한다. 한국에선 서로 벽만 보기 바빴는데 독일인들 은근히 친절하다. 날씨가 꽤 쌀쌀해져서 라디에이터를 5단으로 켜고 포근한 옷으로 갈아입고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저녁. 이보다 마음 편할 수 있을까. 오늘도 역시 독일에 이민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하루다.
*다음 글에서는 이 상상이 독일에서 실제로 현실화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제목 사진출처: 직접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