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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밤 Oct 19. 2023

아무렇게나 지어진 화해의 매듭

이웃과의 싸움 마지막 이야기

대충 매듭을 묶으면 모양새가 엉성하지만 어떻게든 매듭은 지어진다. 

우리와 이웃의 화해는 마치 그런 못생긴 매듭 같았다.


집주인에게 상황을 알린 후, 우리는 윗집과 소통을 끊었다. 무엇보다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서 남편도 더 이상은 건강에 해로우니 그만하자고 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아 억울했지만 나도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이 건물 주민의 반 이상은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었다. 서로 적어도 5년씩 알고 지낸 사이이며, 배우자를 여의고 다들 뭉쳐서 의지하는 것 같았다. 그게 새 이웃을 배척하는 방식이라 유감이지만. 우리 윗집 할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할머니의 딸이 꼭대기층에, 본인은 우리 위층에, 그리고 손녀는 10킬로도 안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증손자들까지 4대가 매주 2-3회 이상 뭉친다. 


서양인들이 대외적으로는 독립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의외로 부모와 굉장히 가까이 살거나 독립했다가 부모 근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비율상으로는 한국보다 낮지만 독일의 캥거루족 수는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다.  




폭풍 같은 싸움이 잊힐 무렵, 집주인이 집에 찾아왔다. 우리가 텃세와 분쟁에도 그 집에서 버틸 수 있던 건 어쩌면 집주인 부부 때문이었다. 둘 다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하고, 남편분은 우리 남편과 비슷한 직종에서 일하고, 집을 보러 갔을 때부터 우리한테 주고 싶다며 이사 일정까지 다 맞춰주었다. 


그날 집주인 남편분은 우리에게 '삼자대면'을 제안했다. 윗집과 우리, 그리고 본인들을 껴서 얘기를 해보자는 거다. 본인들은 제삼자이니 중재자가 되어줄 수 있고 대화 장소로 본인 집을 제안했다. 나는 거절했다. 무슨 솔로몬의 재판도 아니고, 당시 싸움으로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얻은 터라 윗집과 관련된 그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화가 아니라 사과를 받고 싶었다. 


집주인은 얘기하다 나가도 좋으니, 그냥 와주기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정말 강경했으나, 남편이 다음날, 그래도 대화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고, 대화가 잘 되면 좋고, 안 돼도 지금보다 나빠질 수 없으니 최악은 아니라는 거다. 본인도 그 자리에 없었으니 오히려 감정 안 싣고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하여, 나는 그냥 '가는 것'에만 의미를 두기로 했다. 가서 아무 말도 안 할 생각이었다. 

 



집주인집에 들어서니 윗집 할머니, 손녀, 그리고 손녀의 엄마(할머니 딸)까지 3대가 옷을 멀끔히 차려입고 와있었다. 집주인 부부 둘까지 포함해 7명이 테이블에 앉았고, 집주인이 "이 자리는 오해를 푸는 자리"라며 운을 띄웠다. '오해'라는 단어선택이 맘에 안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손녀와 할머니의 얼굴을 보자 속이 매스꺼웠다. 


남편은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다며 내입장을 대변했다. 그러자 손녀는 요즘 어디에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너희가 앙심품고 천정을 때리는 게 아니냐며 받아쳤다. 또 논점이 빗나가고 있다. 그들은 또다시 우리를 가해자로 만들 셈이었다. 나는 금시초문인 얘기 갖다 붙이지 말라, 주제 흐리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정말 안 될 사람들이구나 이거. 다시 남편이 나 대신 말을 이어갔고, 손녀는 자신이 할머니집에 와야 하는 이유를 열거하고, 집주인은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했다. 참고 있던 내가 받아쳤다. "해결책은 내가 진작 제시했다. 부탁도 해보고, 신발 좀 신어달라고 하러 갔더니 난리난리를 치는 걸 보고 대화를 포기했다"라고 하자, 집주인은 손녀를 향해 실내화 신는 게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손녀는 자기 할머니부터 3대가 그 동네에서 자랐는데 이런 대우를 받기는 처음이라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여기서 집주인이 어떤 눈치를 챘는지 말의 주도권을 가져가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알겠네요. 이 동네는 시골이에요. 이사 오면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 모두와 친구가 되는 그런 촌이랍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도시 사람들의 특성을 잘 이해 못 할 때가 있어요ㅎㅎ." -  '여긴 텃세 심한 시골'이란 말을 예쁘게도 한다. 그들에 비해 우리가 너무 큰 도시 출신인 건 사실이었다. 나는 서울, 남편은 상해에서 생활했으니 달라도 많이 다르지. 그렇지만 사는 곳이 달랐다고 사람을 안하무인으로 뭉개는 건 좀 아니잖나? 


정말 할 말이 많았지만 더 있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네, 하고 말았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손녀가 말했다. "신발만 신어주면 되겠어요? 몇 시가 가장 시끄러워요? 그 시간 피해서 올게요." 정말인가? 나는 일이 많은 오후시간을 피해달라고 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유종의 미라도 있겠건만, 그녀는 한 마디를 더 했다. "근데 나한테 나치라고 한 건 진짜 상처받았어요." 네?? 제가 언제요? 그 단어를 입에 올린 적 조차 없다고 했더니, 집주인이 끼어들었다. "엘라, 이해해요. 독일인들한테 외국인 차별자라고 말하는 건 나치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냥 독일인들이 그런 게 있어요." 


아니, 나는 '차별'이란 말을 안 했다고요. 그저 '내가 외국인이라 그래?'라고 했을 뿐인데 나머지는 저분이 쓰신 소설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경끼를 일으킬  정도로 그 말을 듣기 싫었다면 5명이 뭉쳐서 나를 코너로 몰아넣지는 말았어야지. 그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대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는 건 내 욕심이었다. "네, 그렇게 말 안 했는데 그렇게 들으셨다니 유감이네요."라는 말이 그날 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뒤부터 우리가 이사 나갈 때까지,

우리는 건물에서 마주치면 hallo만 할 뿐, 서로 얼굴 붉히지 않았지만 웃지도 않았다. 참으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못생긴 화해의 매듭이었다. 


제목 사진출처: Photo by Brett Jord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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