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점점 작아집니다

유럽식 행복의 이면

by 가을밤

독일, 넓게는 유럽에 살다 보면 행복의 기준이 참으로 소박해진다.


아침에 창문으로 햇빛만 들어와도 감사하고, 마트 점원이 친절하면 감사하고, 몸 건강해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니 감사하며, 택배가 집으로 무사히 잘 도착한 것도 감사하다.


이렇게 행복의 기준을 낮고, 작고, 소박하게 잡는 건 정신건강에 매우 도움 된다.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의식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태도는 겸손함을 길러주기도 한다. 작은 것에 만족을 느끼면 객관적인 지표가 낮을지라도 주관적 행복도는 남들보다 훨씬 높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박한 행복의 기준'이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기준을 낮게 잡을 수밖에 없던 거라면 어떨까? 즉, 낮은 행복의 기준이 자유가 아니라 무기력 끝에 다다른 암묵적 강요라면?




행복의 기준을 높여도 어차피 도달할 수 없으니 실망하고, 좌절하길 반복하다가 결국 낮은 기준의 행복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 일명 '유럽식 행복의 기준'의 맹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데 친절을 기대하는 건, 사실은 응당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고객을 왕처럼 받들으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직원의 미소와 친절한 안내 정도는 서비스 범주 내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에선 이걸 만족의 기준으로 삼는 순간 기대가 무너진다. 그래서 결국 기준을 낮추고 직원이 조금만 웃어줘도 감사할 지경이 된다.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서 전문의를 만나는 것이 (적어도 한국에선) 당연했다. 하지만 독일에선 십중팔구 불가능하므로, 그저 안 아픈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우면 난방을 트는 것이 당연했지만 여기선 어마무시한 난방비 걱정부터 앞서니 그저 더 춥지 않은 날씨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문제는 행복의 기준을 '그 이상으로 높이면 안 된다'는 점이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환경과 생활조건이 나아질수록 더 크고 높은 행복을 지향하는 건 당연하다. 오늘도 건강히 숨 쉬며 눈뜰 수 있다는 거 하나로 매일 평생을 해피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속세를 버리고 종교에 귀의한 현자나 시한부 인생을 받아놓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려울 것이다.


매달 보험비를 수십만 원씩 내고 있으면 적어도 병원엔 쉽게 가고, 약국에 가면 약이 있고, 내 돈 쓸 때 친절한 응대를 받고, 연락을 하면 답변이 오길 기대하며, 일이 정해진 기한 내에 깔끔히 처리되길 바라는 것,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적어도 생수 한잔 정도는 무료로 제공하고, 인간의 생리현상 정도는 무료로 해결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게 그토록 지나친 행복의 기준이었단 말인가.


내 머리는 No라고 하지만, 독일은 나에게 Yes라고 답하길 강요한다. 만족의 기준을 끊임없이 낮추라고. 그리고 딱 그 선에서 감사하라고. 더 작게, 더 낮게, 더 소박하게.


어쩌면 소위 '유럽의 소박함과 검소함'은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더 기대할 수 없게 정착된 사회 시스템과 문화를 오랜기간 겪으면서 생겨난 무기력함을 탈출하는 나름의 방법일지 모른다.


제목 사진출처: 직접촬영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