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감사해?
'인지상정'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편적 자연적 감정이라는 뜻으로,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는 정서를 가리킨다. 여기서 '인간'은 국적을 초월한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든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인성과 연관되어 자주 쓰인다. 하지만 독일의 인지상정은 우리나라와 상당히, 꽤 많은 부분 다른 것 같다.
독일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된 초기, 지인의 독일인 친구(내가 직접 사귄 친구가 아니다)가 한국에 놀러 와서 머물 수 있는 집을 찾는다고 했다. 마침 당시 나도 한국에 가는 시기라 부모님께 여쭤보니 그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라고 하셨다. 혹시 나중에 너도 독일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좋은 관계로 지내면 좋다고 하시며, 우리 집 방 하나를 통째로 그 친구 독방으로 내어 주셨다. 매일 집밥을 해주시고, 사비를 들여 자차로 한국 여행도 시켜주었다. 그 친구는 숙소값, 밥값, 여행비까지 한 번에 해결된 것이다. 그렇게 약 일주일이 지나 그 친구는 독일로 돌아갔고 한참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 달을 기다려봐도 연락이 없자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바쁘다 한들,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마치 없었던 일인 듯 입을 씻을 수 있을까?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직접 문자로 한마디 했다.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신경 써주셨는데 밥 한 끼, 커피 한 잔은 못 살망정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도 없냐? 내가 다 우리 부모님에게 죄송해서 민망할 지경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온 짤막한 답장. "Es tut mir Leid, danke für damals.(유감이다, 그땐 고마웠어)".
나는 독일어 사과 'Es tut mir Leid'를 싫어한다. 본인이 잘못했고 미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과가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답장은 "어쨌든 고맙긴 했다" 정도의 표현이었다.
그 답장은 나에게 인지상정이란 말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긴 개인주의니까."
이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란 남에게 피해 안 주는 선에서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지, 상대의 호의와 도움을 잔뜩 받고 입 씻어도 되는 태도가 아니다. 이기주의와 무례함은 개인주의라는 말로 포장될 수 없다. 또한, 만약 개인주의가 무례함을 정당화 한다면 왜 다른 독일인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할까? 그들도 개인주의 사회에 사는데. 결국 그 친구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다른 의미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유교문화 없는 서양에도 감사하는 문화는 있다.
나는 이렇게 상대방의 도움과 호의에 '뻔뻔한 태도로 대응하는' 태도가 일종의 독일문화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친구와 같은 유형을 살면서 생각보다 자주 봤기 때문이다. 독일에 장기거주 하는 분들의 이야기와 내 경험을 종합해 보면, 그들의 마인드는 이렇다.
"니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거잖아."
즉, '내가 도움을 필요로하긴 했지만 도와준 건 니 의사였다. 니가 좋아서 도와준 것이니 특별히 혹은 지나치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무슨 인지상정은 개나 줘버린 마인드란 말인가!
실제로 최근 2~3주 동안 매일 이웃의 반려동물을 봐주고 1유로도 안 되는 초콜릿 하나를 받은 적이 있다. 아무리 호의로 해준 것이지만 이런 선물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타인의 도움으로 본인은 펫시터 비용을 최소 200유로 이상 아꼈는데, "니가 한다고 했잖아."라는 마인드로 퉁치는 태도는 정말이지 인류애가 사라질 정도다. 돈은 쓰기 싫고, 어쨌든 도와줬으니 뭐 주기는 해야겠고. 그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교수님께서 나한테 하신 말씀이 있다. "독일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뭐 좋아한다, 잘한다는 말 하지 말거라. 다 뒤집어쓴다."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자, 교수님께서는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유학시절 독일 친구들 앞에서 "한국에서 설거지 많이 해봤다"라고 한 번 말했다가, 그 뒤 식사만 하면 모든 설거지 담당은 자연스레 자기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누구도 고맙다, 수고했다는 말을 안 했다고. 나중에 알고보니 "너 설거지 좋아한다며. 니가 좋아하는 거 한 건데 뭐가 고마워?"라는 대답을 들으셨다고 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 받은만큼 베푸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닌 사람도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그러니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자. 인지상정이라는 말은 싹 잊고, 상대방에 대한 기대를 0이 아닌 마이너스로 낮추자. 상식을 머릿속에서 지우자. 그래야만 제 명에 살 수 있을 것이다.
제목 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