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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고야 말았다

by 가을밤

또 보고야 말았다. 독일어 시험.


C2시험 안내서 (사진=직접촬영)



얼마 전, 독일어 C2 자격증을 갱신하고자 재시험을 봤다. 이로서 올해 상반기 목표 중 하나를 이루었다. C2는 유럽 언어기준 중 가장 높은 단계로, 일반적으로 이 단계를 마치면 모국어 수준과 대등하다고 여겨진다. 참고로 이 기준은 A1, A2, B1, B2, C1, C2로 나눠지며, 독일대학에 진학하려면 최소 B2-C1을 증명해야 한다.


<Grosses Deutsches Sprachdiplom(큰 독일어 자격증): 줄여서 GDS>라 불리고 주로 독일학교 교사나 전문 통번역가에게 요구되는 이 C2 시험은 가장 싸게 보면 355유로(53만 원), 비싸게 보면 540유로(80만 원)로 모든 독일어 시험을 통틀어 응시료가 가장 비싸다. 읽기/듣기/말하기/쓰기를 한 번에 보면 355유로지만, 각 모듈별로 보면 135유로다.



독일어 시험종류는 텔크와 괴테로 나눠지는데 대체적으로 괴테자격증(괴테인스티튜트에서 주관하는 시험)이 더 어렵다. 나는 첫 단계인 A1부터 C2까지 모두 괴테 시험으로 치렀고, 모든 시험을 독학으로 준비해서 합격했다. 아무튼 서론이 길었는데 왜 C2 시험을 또 봤냐 하면,


첫 시험에서 불합격해서? 아니다.

이전 성적이 불만족스러워서? 아니다.

자격증을 제출해야 할 곳이 생겨서? 아니다.

누가 독일어 가지고 뭐라고 해서?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진짜 '그냥' 봤다. 시민권 시험도 그냥, 이 시험도 그냥 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이 생기면 단기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단골타깃은 외국어였다. 초등학교 땐 한문급수 자격증을(외국어는 아니지만), 대학에선 독어 자격증을 땄으며, 독일유학을 앞두고는 6개월 정도가 남길래 중국어 자격증 4개를 땄다. 교환학생 기간에는 대입용 독어시험으로 여겨지는 <Test DaF> 3번, 그리고 독일 대학에서 주관하는 <DSH>까지 봤으니 대학졸업 전까지 취득한 독어 자격증 종류만 총 6개였다.


이번 시험 응시는 어쩌면, 멀어지는 독일을 붙잡고 싶은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을 정도로 좋아한 독일어와 독일이, 실제로 10년 넘는 세월 동안 직접 살며 피부로 겪어보니 참 정 떨어지고 학을 뗄 일이 많았다(지금도 많다). 그 과정에서 점점 지쳐갔고, 한때는 퇴근 후 독일어를 쳐다도 보기 싫은 날도 있었다. 지금은 밸런스가 맞춰져서 매일 4개 국어(독어/영어/한국어/중국어) 쓰는 게 피곤하지 않지만 처음에는 마치 언어가 내 일상을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언어를 사랑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다시 돌아봐도 나는 독일어가 좋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점은 이 말이 결코 '독일을 좋아한다'거나 '독일이 살기 좋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거다. 내 모국어인 한국어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자식과 같다면, 독일어는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반려동물 같달까.


지긋지긋할 정도로 독일이 나에게 온갖 수모를 줘도 나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또 갈고닦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수모를 주기에 더더욱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외국살이에서 언어는 전쟁터에서 쓰일 총알과 같다. 백날 전쟁터 뛰어봐야 장전할 총알이 없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독일이 아무리 밉고 때론 독일인들이 원망스러워도 그들의 언어에는 죄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내가 그들의 언어를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이 땅에 발붙일 힘이 남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목 및 본문 사진: 직접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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